서양에선 체스를 두고 동양에선 바둑을 즐긴다. 체스는 상대 말을 많이 잡아먹어야 이긴다. 시작할 땐 판에 말이 많지만 끝날 땐 이겨도 대부분 상대에게 잡혀 먹히기 일쑤다. 반면 바둑은 상대방 돌을 포위해 공격한다. 상대방 돌을 잡아먹기보단 집을 많이 차지해야 이긴다. 체스는 시작할 때 가득했던 말이 끝날 땐 거의 없지만, 바둑은 그 반대다. 처음엔 바둑판이 비었지만 끝날 땐 바둑돌로 가득 찬다. ‘손자병법’에선 모든 걸 파괴해서 이기는 체스식 승리를 파승(破勝)이라 한다. 반면 상대방을 포함한 주변의 가치를 온전히 보존한 채 이기는 바둑식 승리를 전승(全勝)이라 한다. 예로부터 파승보다 전승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경제 정책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기업의 활력을 북돋우기보다 정부가 모든 걸 챙기겠다는 강한 의욕이 넘쳐난다. 유력 후보 측은 서민경제의 맥박이 꺼져가는 경제 비상사태에서 시장보단 정부가 나서 긴급 처방을 내리겠다고 한다. 재정 확대정책을 위한 재원마련에 증세는 불가피하다. 재벌과 부자에 대한 과세 강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법인세 인상이 유력시되는 이유다. 그러나 법인세 인하는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은 26일 세제 개혁안을 내놓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35%인 법인세율을 15%로 내리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개인은 물론 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역대 최대 규모의 감세방안이 포함된다. 이는 기업 투자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다. 기업은 국부의 근원으로 나무이자 국가를 지키는 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역으로 정부가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한다. 법인세율이 낮아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에선 투자가 늘어나 더 많은 기업이 법인세를 내 세수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법인세 인상으로 투자의욕이 꺾여 세금을 걷을 회사가 줄면 세수는 더 줄 수밖에 없다. 과연 기업의 의욕을 꺾고 법인세를 올리는 파승적 전략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독려하는 환경을 만들어 그들의 온전한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전승을 이룰 것인가. 이는 차기 정부의 몫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반기업 정서는 재벌 정책에 있어 어느 후보 가릴 것 없이 규제 강화로 이어진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집중 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 도입 등 상법개정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재벌의 불법적인 경영승계나 탈세 등은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엄중히 처벌해야 마땅하다. 황제경영의 폐단 역시 근절돼야 한다. 그러나 대기업을 공격하는 수단과 대기업이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적어도 균형을 이룰 수 있게는 해야 한다. 무조건 기업만 때려잡는 파승적 전략으론 대승적 공정사회 확립을 이룰 수 없다. 기업도 투명성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한다. 정치도 기업의 투명성을 지켜줘야 한다. 빌딩에 갇힌 코끼리는 이제 가만히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스스로 생존전략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지배구조를 자신이 바꾸도록 적극 유인해주는 전승적 전략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보들이 각종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겠다면서도 정작 어떤 규제를 풀겠다는 공약은 안 보인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까닭인가. 오히려 업종지정, 의결권 제한, 성과 공유, 고용할당 등 규제강화 약속만 넘쳐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기업의 기를 살려주고 활력을 넘치게 하는 우호적인 환경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대선은 정권의 변화뿐 아니라 정책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한비자’는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벌레가 먹었기 때문이고, 담장이 허물어지는 것은 틈이 생겼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벌레가 먹었다고 해도 강풍이 불지 않으면 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담장에 틈이 생겨도 큰비가 오지 않으면 허물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나무와 담장은 온전한가. 새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나무와 담장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이 위기상황에서 취해야 할 전승적 전략일 것이다.
장학만 산업부장(부국장) trendno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