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옆자리 후배가 물었을 때, 무심코 답해놓고 나 스스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더 이상 멋진 남자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정우성이 와도 안 흔들려.” 안 흔들린다기보다는 못 흔들리는 것이며(얘들아, 엄마는 떠나지 않아!), 못 흔들린다기보다는 아니 오는 것(정우성이!)이지만, 마음 하나는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한지. 그게 행복이냐 따져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저 외로운 사냥꾼의 피로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오래 잊고 지냈던 고독한 헌터의 피로가 뜻밖의 국면에서 귀환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장미꽃보다 먼저 들이닥친 대통령 선거 탓이다. 촛불항쟁을 통한 시민혁명을 거치며 내 한 표의 값어치는 그 어느 때보다 귀중해졌다. 이 소중한 한 표를 누구에게 줄까, 이렇듯 꼼꼼하고 까칠하게 따져본 적이 있었나. 그간의 ‘답정너’ 투표를 떠올려보면 A와 B와 C 사이에서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촛불이 안겨준 축복이다. 하지만 기대했다 실망하고 매혹되었다 포기하는 과정이 너무 자주, 격하게 반복된다. 오직 이 후보만이 당선의 자격이 있고 그가 되면 요순시절이라도 펼쳐질 듯 핏물 흥건한 전투가 한창이건만, 만연한 희망의 투사(投射)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나만 홀로 고독한 것 같은 기분.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만났다 다시 돌아서는 피로가 실로 막대하다.
비관이 질병인 나 같은 사람만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서울경제신문과 한국리서치가 15~1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금 지지하는 후보를 다른 후보로 바꿀 수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5.3%였다. 한국갤럽이 11~13일 실시한 정례 여론조사에서도 “아직 지지후보가 없거나 유보 중”이라고 답한 사람이 10%, “상황에 따라 지지후보를 바꿀 수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36%에 달했다. 이른바 부동층(浮動層), 스윙보터들이다. 둥둥 떠다니는 갈대와도 같은 이 표심은 대체로 선거에 관심 없는 정치 무관심층이나 정치적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유권자들로 이해돼 왔다. 정치 선각자들이 각성시켜야 할 계몽과 훈계의 대상이거나 정체성도, 지향도 흐릿한 기회주의적인 표심으로 치부돼 온 게 사실이다.
‘팩트폭력’이라는 시대적 트렌드에 입각해 부동층을 위한 변명을 시작해보자. 지난해 발표된 문은영 정치학 박사의 건국대 박사학위논문 ‘한국 부동층의 특성과 부동층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 효과’는 선거운동을 직접 경험한 국회 보좌진 120명 설문조사와 역대 선거 데이터를 분석한 논문이다. 결과는 통념과 판이했다. 부동층을 기권층과 분리해 별도 범주로 나누면, “부동층은 비교적 젊은 층으로서 고학력자이며 선거에 대한 관심과 효능감이 높고 새로운 정치정보를 수집하여 적극적으로 투표결정을 내리는 합리적 유권자”라는 게 논문의 분석 결과다. 무당파이거나 중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특정 정당이나 이념에 대한 지지 내지는 선호가 있지만, 인물과 정책/공약을 투표결정요인으로 최종 판단”하며 “시민의 참여와 대표의 책임성을 핵심요소로 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시민들”로 예측된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같은 번호만 찍는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어떤 악재에도 지지 후보를 옹호하는 데만 골몰하는 극렬지지자들보다 훨씬 건강한 민주주의의 대들보인 셈이다.
연애감정으로서의 사랑이란 기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한 노력일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랑은 의리다. 하지만 이런 의리적 사랑은 결혼계약 하나로 충분하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고, 종교도 소수자 차별로 규탄 받는 시대다. 지지 후보의 잘못을 추상같이 비판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며, 수정되지 않을 시 지지를 철회하는 것만큼 정치인에게 도움이 되는 지지자가 있을까. 아직도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내면에서 조바심과 초조함이 생겨날 때면, 스윙보터의 합리적 유권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출근 좀비가 될지언정 꼼꼼히 TV토론 챙겨 보며, 스윙~ 스윙~ 스윙~.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스윙보터는 스윙댄스를 춘다. 함께 춤추고 싶다면, 내 마음을 뺏어봐.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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