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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국가대표 졸전 때마다 투혼 부족?

입력
2017.04.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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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ㆍ프로 스포츠 선수 32%가

“정신력보다 팀워크가 경기 좌우”

아직도 개발시대 헝그리정신 강요

3월 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인 대만전에서 승리를 거둔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관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3월 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인 대만전에서 승리를 거둔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관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3월 6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팀이 약체로 평가됐던 이스라엘에 연장 10회까지 가는 혈투 끝에 1-2로 무릎을 꿇었다. 이어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도 0-5로 완패했다. 사실상 조별라운드 탈락이 유력해진 상황. 야구대표팀을 질책하는 기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내용은 ‘투혼 실종’이었다.

# 2주 뒤인 23일, 중국 창샤의 허룽스타디움에서 열린 중국과의 2018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6차전은 때맞춰 문제가 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ㆍTHAAD) 논란으로 국가 간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축구대표팀은 0-1로 패배했다. 무기력한 경기에 ‘투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비판과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지적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WBC 1차전 상대인 이스라엘은 대회 최대 돌풍의 팀이었고, 네덜란드는 빅리거를 다수 보유한 야구강국이다. 중국 축구대표팀은 세계적 명장 마르첼로 리피(69ㆍ이탈리아)감독을 데려와 축구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듣는다. 문제는 ‘투혼’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그럼에도 ‘정신력’과 ‘투혼’은 한국 대표팀이 졸전을 벌일 때마다 ‘만능열쇠’처럼 원인으로 등장한다. 실력 차이가 명확한 상태에서 투혼으로 이를 극복하라는 주문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본보는 지난 7~10일 프로·아마 스포츠 선수 104명을 대상으로 ‘정신력’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65%가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본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력 부족 논란은 스포츠 선수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묻는 질문에 57%의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선수가 어디 있나 싶어 속상하다’고 답했다. 이어 경기력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이들이 ‘팀워크(32%)’를 꼽았다. 그 뒤를 ‘체력(23%)’이 이었다. 정신력은 세 번째(21%)요소였다.

설문결과에 따르면 선수들은 대부분 정신력 부족이라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스로 정신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력을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1순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축구대표팀이 지난 3월 23일 중국 후난성 허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6차예선 A조 중국과의 경기에서 0-1로 패한 뒤 고개를 숙이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가고 있다. 창샤=연합뉴스
한국축구대표팀이 지난 3월 23일 중국 후난성 허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6차예선 A조 중국과의 경기에서 0-1로 패한 뒤 고개를 숙이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가고 있다. 창샤=연합뉴스

한국 스포츠에서 정신력은 구체적 정의 없이 ‘근성’과 동의어로 쓰이곤 한다. 2002 한ㆍ일월드컵 수장 거스 히딩크(71ㆍ네덜란드)감독은 실체 없이 떠돌던 한국 스포츠의 정신력 개념을 명확히 정의했다. 히딩크는 정신력을 근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한국식 사고방식을 경계하며 정신력의 개념을 일곱 가지(내적 동기부여ㆍ헌신도ㆍ성취도ㆍ의사소통ㆍ책임감ㆍ자신감ㆍ실전경험)로 분류했다. 그 결과,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은 내적동기부여와 헌신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낙제점을 받았다.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한 의사소통(20점)을 높이기 위해 히딩크 감독이 고참과 신참 선수가 경기도중 서로 반말을 하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명확한 실체로 규정되지 않은 정신력을 선수들에게 강요해온 이유는 개발시대의 ‘캔두이즘(Cando-ismㆍ할 수 있다는 정신)’에 있다는 분석이 있다. 과거 턱없이 부족한 스포츠 관련 인프라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며 국위선양을 강요하고 선수를 ‘전사’로 포장했던 개발시대의 명령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임춘애와 라면’으로 대표되는 헝그리 정신의 서사가 시대와 맞지 않는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스포츠심리학)는 “경쟁에서 최고가 되려면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이 정신력 무장이 헝그리 정신을 강요해 개인이 무시되거나 유린되는 모습은 폭력적”이라고 꼬집었다. 정 교수는 이어 “명백한 실력의 문제를 정신력으로 원인을 돌리면 더 큰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며 “모든 게 심리로 해결된다는 발상은 오히려 문제를 덮어가는 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신력 논란이 결과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응용(76)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WBC 대회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면 정신력이 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정신력 문제가 아니라 연습부족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같은 분위기여도 지면 과도한 긴장 탓, 이기면 자유로운 분위기 덕’ 등 정신력과 관련된 논란은 결과에 따라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정용철 교수는 “이제 국가가 정신력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다. 정당하게 겨루고, 즐거움과 만족을 얻으며 재능을 발휘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스포츠문화를 일궈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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