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테스트(Bechdel Test)’라는 것이 있다.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영화 속 남성편향성을 알리기 위해 만든 성평등 테스트다.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이 세가지 기준으로 구성된 테스트는 지난 2013년 테드(TED)에서 한 미국 비영리 시민학교 교사가 주목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던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를 본 미국의 장애인활동가 겸 칼럼니스트 앤드류 풀랑은 장애인 버전의 벡델테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디어는 남성중심적일 뿐 아니라 비장애인중심적이지 않은가. ‘티리온테스트(Tyrion Test)’의 탄생 배경다. 영화나 드라마 속 장애인 등장인물의 편견 없는 기용 여부에 대한 가늠자로 통하는 이 테스트 이름은 미국 드라마인 ‘왕좌의 게임’ 속의 캐릭터 ‘티리온 라니스터’에서 따왔다. 왜소증이지만 특유의 지혜와 리더십을 발휘하는 ‘티리온’이 이 테스트의 지향점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애인의 날’(4월20일)을 앞두고 지난해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한 한국영화 중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한 영화에 티리온테스트 기준 3가지를 적용해 봤다. ▦한 명 이상의 장애인 등장인물이 극중 주요 줄거리에 관여하되 여기에 장애가 주 요소가 되는 지, ▦장애가 현실적으로 묘사되는 지, ▦영화 속 장애인이 단지 도움을 받는 사람을 넘어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나오는 지 등이다.
‘내부자들’은 통과했지만 ‘부산행’은 아쉬워
지난해 관객 수 100만명을 넘었던 한국영화는 26편. 이 가운데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는 단 8편이다.
전체 박스오피스 1위였던 ‘부산행’(1,156만명) 에 지체장애를 가진 ‘노숙자’가 등장한것은 긍정적이다. 영화 속 조연으로 나온 그는 좀비로부터 힘겹게 도망치는 모습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또한 극중 인물들이 몸이 불편한 ‘노숙자’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다투는 장면을 통해 각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부산행’은 첫 항목부터 통과하지 못한다. ‘노숙자’는 줄거리에 깊이 개입했지만, 오직 장애라는 특징만을 강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 ‘나는 행복하다’, ‘엄마’ 등을 연출한 류미례 감독은 “재난영화 속 장애인은 주로 관객에게 위기상황을 더 처절하게 느끼게 하는 역할로 나오는데 부산행은 그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평했다. 다만 류 감독은 “‘노숙인’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도운 다른 인물들을 구했다는 점은 기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항목이 요구하는 것처럼 영화 속 장애인이 도움을 주는 존재로 표현됐다는 설명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강타한 영화 속이 대표적 장애인 캐릭터는 ‘내부자들’(192만명)에서 나왔던 안상구(이병헌)다. 대기업 비자금 문서를 두고 거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오른손을 잃게 된 안상구는 복수심에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나왔다. 영화는 티리온테스트를 통과한다. 안상구가 장애 외에도 복합적인 요인으로 줄거리에 개입하고, 그의 장애가 과장되게 표현되지 않는 점. 안상구가 검사 우장훈(조승우)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협력하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안상구가 장애를 편견 없이 묘사했다고 보긴 어렵다. 영화 속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그는 갑자기 왼손으로 오른손의 의수를 뺀 뒤 장애를 입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충격은 ‘낯선 몸’에 대한 본능적 충격이다. 손홍일 대구대 영문과 교수는 “많은 영화들이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이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오빠생각’(106만명) 속에 상이군인 ‘갈고리’(이희준)가 악역으로 나왔던 줄거리와 비슷한 맥락이다.
낭만 속에 빠져있는 장애 묘사
대부분의 영화는 두 번째 기준인 ‘현실적인 장애 묘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각장애인 주인공을 전면으로 내세운 ‘형’(297만명)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인 고두영(도경수)은 유망한 유도선수였지만 시합 도중 부상으로 시력을 잃었다. 그런 그에게 오래 전 집을 떠났던 형(조정석)이 찾아왔다. 전과 10범으로 감옥에 있었지만 동생의 장애를 핑계로 가석방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형제는 가까워지고, 형의 권유로 유도를 다시 시작한 주인공은 결국 장애인올림픽에서 메달을 가져온다는 줄거리다
영화는 장애를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지만 장애가 가져오는 역경은 묘사하지 않았다. 류 감독은 “사고 전 국가대표 선수였을지라도 시력을 잃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을 텐데, 이 영화에선 이런 고난의 과정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한 이 영화에선 동생이 다른 인물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도 찾아보긴 어려웠다.
장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은 ‘덕혜옹주’(559만명)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실제 조현병을 앓았던 덕혜옹주의 모습을 그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기는 상궁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다시 돌아온 궁궐에서 이미 세상에 없는 고종 황제(백윤식)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김헌식 영화평론가는 덕혜옹주가 “극중 표현을 위해 낭만적인 관점으로 조현병을 다뤘다”고 전했다.
기억장애를 다룬 ‘럭키’(695만명)와 ‘탐정 홍길동’(143만명) 또한 비슷하다. ‘럭키’는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가 주인공이며, ‘탐정 홍길동’의 주인공은 어릴 적 해마 손상으로 기억을 상실하고 위협을 느끼지도 못한다. 두 사람의 장애는 극중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줄거리의 중심은 아니며, 두 사람 역시 다른 캐릭터들에게 도움도 주고 상처도 입히는 등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두 캐릭터의 기억장애는 비현실적이란 게 중론이다. 뇌손상에도 불구하고 기억되는 ‘칼솜씨’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는 식이다. 김 평론가는 “기억상실은 아직까지 영화 속에서 은유적ㆍ상업적 장치로만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상실을 정신장애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분석에서다.
기욤 뮈소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돼 화제가 됐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112만명)의 상황 역시 유사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인 한수현(김윤석)은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갔다가 시각장애인 노인을 만난다. 노인이 전해준 알약을 먹고 난 뒤 수현의 시간여행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노인의 등장은 딱 한 장면뿐이라 테스트를 적용하긴 무리다. 다만 시각장애를 가진 노인이 신비한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은 짚어볼 만 하다. 류 감독은 “시각장애인이 예언자나 점쟁이 등으로 등장하는 것은 ‘장애가 있으면 다른 감각이 발달할 것’이라는 착각과 편견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왜 ‘후천적 장애’만 보일까
테스트 기준과 상관없이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 영화 속 장애인캐릭터들 대부분이 ‘후천적 장애’라는 것이다. 8편 중 6편의 캐릭터가 그렇다. ‘부산행’ 속 ‘노숙인’이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속 노인 이 두 캐릭터는 영화를 통해 장애를 갖게 된 계기를 알 수 없을 뿐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런 설정 역시 한국사회의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는 지적이다. 김헌식 영화 평론가는 “선천적 장애가 극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과 가까이하지 않고 친밀하지 않은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평론가는“후천적 장애는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감정이입을 불러일으켜 영화에 집중하게 하는 방편이지만 이런 구조가 계속된다면 선천적 장애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계속 굳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8개의 영화 중 티리온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내부자들’ 뿐이다. 하지만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장애인 인권의식이 높다고 보긴 어렵다는 평가다. 시종일관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판타지 영화 ‘트와일라잇(Twilight)'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것처럼 테스트엔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티리온테스트를 만든 풀랑 역시 네티즌의 의견을 받아 기준을 지속적으로 개선시키고 있다.
중요한 건 ‘장애’라는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꾸준한 노력이다. 영화는 한 시대의 가치관과 선입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를 왜곡하고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류미례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 속 장애인 캐릭터가 현실과 부합하는지, 인권적 측면에서 거슬리는 부분은 없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살펴봐야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장애캐릭터 묘사에 신중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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