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록(30)은 6년 전 어버이날 쓰러졌다. 2011년 5월 8일 제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제주와 대구의 경기였다. 후반 37분 제주 신영록이 슛 동작을 하고 나오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부정맥으로 인한 심장마비. 이런 경우 소생 가능성은 2% 남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영록은 놀랍게도 46일 뒤 의식을 회복했다. 한 때 ‘기적의 아이콘’으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잊혀졌다. 1987년생인 신영록의 동기들이 발 벗고 나섰다. 그가 쓰러진 직후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병문안도 가고 집을 방문한 적도 있다. 몇몇 동기들이 ‘우리가 모임을 만들어 영록이를 돕자’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중 짬을 내기 힘들고 각자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무산되곤 했다. 신영록과 제주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강수일이 팔을 걷어붙였다. 작년 말 동기들 연락처를 수소문해 카카오톡 메신저에 초대했다. 신광훈과 이상호(이상 서울), 박현범(수원), 박종진과 김동석(이상 인천), 김진현(세레소 오사카), 안지호(강원), 배승진(성남) 등 지금 프로에서 뛰는 선수뿐 아니라 은퇴해서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까지 40여 명이 금세 모였다. 1987년 1~2월 생이라 신영록과 연령별 대표로 함께 뛰었지만 실제로는 한 살 위인 박주호(도르트문트), 최철순(전북), 심영성(강원), 정경호(안산)도 기꺼이 동참했다. 작년 12월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 신영록을 초대해 첫 모임을 열고 밥을 먹었다. 모임 이름은 ‘에잇세븐(87)’으로 정했다.
“(이)상호야 너 서울로 이적했더라.” “중국에 있는 (하)태균이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영록은 동기들 소식을 훤히 꿰고 있었다. 강수일과 함께 모임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박종진은 “영록이가 반가우면서도 너무 늦게 모인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하고 짠했다”고 털어놨다.
박종진은 신영록과 특히 인연이 깊다.
그는 중3 때 수원 삼성 축구단 연습생으로 뽑혀 약 1년 반을 프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 때 신영록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이미 수원에 정식 입단해 있었다. 쟁쟁한 대선배들 아래서 막내였던 둘은 실력과 우정을 함께 키워나갔다.
“영록이 이야기는 중학교 때부터 많이 들었죠. 세일중(신영록 모교)에 ‘장사’ ‘괴물’이라 불리는 공격수가 한 명 있다고요. 직접 보니 어땠냐고요? 평소에는 진짜 밝고 장난도 많이 쳐요. 그런데 운동장만 들어가면 소문하고 똑같아 지더라고요. 그 어린 나이에 선배들한테도 안 지려고 독 품고 몸싸움 하던 모습이 선해요.”
신영록과 박종진은 두 살 위인 1985년생 박주영(서울), 이근호(강원) 등과 함께 청소년대표에 뽑힐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청소년대표 시절에도 둘은 막내였고 항상 붙어 다녔다.
“아시아청소년축구(2004년) 8강전(우즈베키스탄) 전날이었어요. 평소에 영록이는 청소도 잘 안 하는 편이어서 저한테 늘 잔소리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축구화랑 정강이보호대를 깨끗이 닦은 책상 위에 놓더니 주문을 외더라고요. ‘난 내일 골을 넣을 거다’ 이러면서. 제가 ‘야! 쓸데 없는 거 하지마’ 라며 구박했는데 다음 날 영록이가 기가 막힌 오버헤드킥(연장 결승골로 한국 2-1 승리)으로 골을 넣었죠. 그 골 덕분에 4강 가고 결국 우승했잖아요.”
신영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강인하고 득점 욕심이 많았던 선수라 말한다. 강수일은 신영록이 쓰러지던 날, 그에게 마지막 패스를 찔러줬다. 그는 “영록이는 아주 강한 선수였습니다. 지금도 강해요. 그래서 이겨낼 겁니다”고 힘줘 말했다.
신영록의 별명은 ‘영록바’(신영록+드로그바)다. 신영록을 수원 삼성에서 지도했던 차범근(64) 전 감독은 “루디 푈러(독일의 전설적인 공격수)같은 선수다”라고도 했다. 이런 집념과 근성이 (소생 가능성)2%의 확률을 뚫고 일어선 원동력일지 모른다.
‘에잇세븐’은 돈을 당장 많이 걷기보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십시일반으로 매년 약 1,000만 원을 신영록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하지만 금액보다 더 중요한 건 신영록에 대한 관심이다. 박종진과 강수일은 “우리 모임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영록이를 다시 떠올려 도움의 손길이 많아지도록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신영록은 사고 후 1년간의 입원을 거쳐 2012년 가을부터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해왔다. 병원 치료비용은 한 번에 30만 원. 1주일에 4번 가면 한 달에 수 백 만원이 훌쩍 넘는다. 신영록에게 여러 차례 후원금을 보내온 이근호 등 부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도움을 제외하면 수년째 신영록의 부모가 자비로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는 요즘 돈보다 재활 병원을 찾는 일이 더 걱정이다. 병원은 병원 재활 치료 횟수를 1주일에 4번에서 3번 또 다시 2번으로 줄이더니 급기야 더 이상 재활 치료를 해줄 수 없다고 지난 6일 통보해왔다. 신영록 어머니 전은수 씨는 “우리가 비용을 부담하는데도 병원에서 안 된다고 하더라. 5년 넘게 다녀 영록이에게 가장 익숙하고 상황을 잘 아는 병원에서 받아줄 수 없다고 하니 눈 앞이 캄캄하다”고 발을 굴렀다.
신영록은 혼자 수저로 밥을 뜰 수는 있어도 젓가락질은 못한다. 이동할 때면 반드시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 세밀한 근육을 자기 의지대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재활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머니 전씨는 “사고 후 몇 년 동안 5월만 되면 언론 인터뷰 요청이 오곤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지만 인터뷰 한 번 하면 영록이도 녹초가 되고 치료 시간도 뺏기고 그래서 언제부턴가 아예 인터뷰를 안 했다”며 “영록이가 정상적인 생활만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만 바란다. 그러려면 꾸준히 다닐 수 있고 제대로 시설을 갖춘 재활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애타게 말했다.
동기들이 뻗친 온정의 손길은 고맙기만 하다. 전씨는 “병원을 못 가고 집에만 있으니 영록이가 자꾸 쉬려고 하고 무기력해 진다. 친구들을 보면 기분도 전환되고 자극도 받아 더 열심히 운동한다. 아들 생일(3월 27일) 때마다 매년 동네 친구들이 놀러 오는데 얼마 전에도 왔다 갔다. 친구들과 밖으로 나가니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생일 다음 날인 지난 달 28일에는 차두리(37) 축구대표팀 전력분석관 초청으로 시리아와 A매치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오랜 만에 찾았다. 형 신영록을 데리고 경기장에 간 동생 영훈씨는 “그라운드는 형이 늘 있던 곳이다. 운동장을 보는 형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고 했다.
‘에잇세븐’은 올 연말부터 매년 자선 축구경기를 열 계획이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 신영록이 축구화를 신고 함께 땀 흘릴 수 있는 날까지 자선경기를 이어갈 계획이다.
“영록아! 너 등 번호는 몇 번으로 해줄까? 우리랑 축구 하려면 재활치료 더 열심히 해야 돼.”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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