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많이 못구해 미안하다” 아직도 딸 대신 사죄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11분. 최숙란(53)씨 휴대폰으로 딸 전수영(당시 25ㆍ단원고 2학년2반 담임교사)씨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 어떡해 배가 침몰하고 있어’ 문자를 보고 놀란 최씨는 평소에는 잘만 눌러지던 딸의 번호를 여러 번 틀려가며 겨우 수영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통화에서 최씨가 꺼낸 첫마디는 “구명조끼는 입었어?”
돌아온 딸의 답은 “애들은 입혔어”다. 최씨는 이 말을 듣고 학생들 먼저 챙기느라 정작 딸은 구명조끼를 못 입었다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딸은 “구조대가 오고 있어서 여기저기 연락하려면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며 전화를 끊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짧은 통화를 마치기 직전 “(구명조끼) 얼른 입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가 침몰하고 34일 만인 5월 19일, 287번째로 3층 주방과 식당 사이 출입문 근처에서 발견된 수영씨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발목이 많이 다친 상태였다. 수영씨가 있던 곳 가까이에서 일 하다 구조된 한 선사 직원은 “학생들을 다 올려 보내고 힘이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주저앉아 있던 여교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최씨는 “아마 그 여교사가 수영이였을 것”이라며 “그 날 수영이가 아침식사 당번이어서 혹시나 식당에 학생들이 남아있을 까봐 내려가 봤을 거에요”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수영씨 교사수첩 제일 앞 페이지에 쓰여져 있는 맹세다. 2013년 수영씨가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문구이기도 하다. 수영씨는 이 맹세를 배 안에서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지켰다.
교사수첩에는 수영씨가 학생들을 아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수업을 들어갔던 1반부터 5반까지 발표한 학생들 번호나 이름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고, 칭찬해야 할 학생에게 과자를 줘야 한다는 메모도 있다. 국어 교사였던 수영씨는 참사가 있기 전 ‘귀촉도’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각반 진도와 분위기도 빠짐 없이 수첩에 남겨놨다. 특히 제주도로 떠나기 전 오전에 진행된 수업에 대해서는 ‘수학여행 날 인데도 분위기가 좋았음’이라며 학생들을 대견해 하기도 했다.
“2학년으로 같이 올라가요”
2013년 2월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3월에 단원고에 부임한 수영씨는 바로 1학년 담임교사를 맡았다. 꼭 담임교사를 할 의무는 없었지만 “학생들과 함께 지내며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제자들도 이런 수영씨의 의지를 알아보고 유독 수영씨를 따랐다. 1학년이 끝나자 담임을 맡았던 6반뿐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까지 ‘내년에도 선생님이 국어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2학년으로 같이 올라가요’ ‘선생님이랑 2학년에도 국어 공부하면 1등급 맞을게요’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영씨는 제자들의 바람대로 2014년 학년 수요조사에서 ‘2학년’을 1순위로 써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나 애들이랑 3학년까지 쭉 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씨는 “만약 수영이가 살아있었다면 2015년에 분명히 3학년을 1순위로 써냈을 거에요”라며 “대학교 진학도 정말 있는 힘껏 도와줬을 거에요”라고 말했다.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2학년을 선택한 수영씨는 이렇게 부임 후 첫 수학여행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을 가게 됐다. 교사로서 첫 수학여행을 떠나면서도, 수영씨는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교재를 챙겼다고 한다. “안개 때문에 돌아오면 수업을 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언제든지 돌아와 수업할 준비가 돼 있던 수영씨의 교사수첩은 2014년 4월 15일부터 공란이다.
엄마는 딸 대신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딸을 돌이켜보며 어머니 최씨는 “수영이가 살아 돌아왔더라도 과연 수영이가 잘 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면 자신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학생들을 아끼는 수영이가 희생된 아이들 생각에 아마 스스로 자책하고 고통 받으며 살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 “지금의 나처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최씨는 자신의 말처럼 ‘선생님’이었던 딸 대신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살고 있다. 20년 가까이 교단에 섰던 그는 “나라도 ‘선생님’을 외치며 두려워하는 학생들을 두고 나올 수 없었을 거 같아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더 괴롭네요”라고 했다. 최씨는 수영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학부모들에게 “미안해서” 진도체육관 1층에 머물지 않았다. 대신 체육관 2층 구석과 체육관 밖 추운 임시 텐트를 오가며 딸을 기다렸다. 죄책감에 봉사활동을 신청해서 체육관 청소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최씨는 딸이 가르쳤던 한 학생의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학생들을 많이 구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한단다. 그는 “수영이가 담임이었던 2반 희생 학생 부모님과 지금까지도 연락해요”라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자식들을 대신해 ‘사제지간’으로 위로해 주고 있는 거 같아요”라고 했다.
슬퍼도 괜찮다
최씨는 수영씨가 하늘로 떠난 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잠자리에 누워도 새벽만 되면 뒤척이다 깨는 것을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일기를 썼다. 이 일기를 ‘수영이와의 대화’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일기를 쓰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면 모아놨던 편지를 꺼내보며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모아 최씨가 기억하는 딸 수영씨를 기록한 ‘세월호의 벚꽃송이’라는 세상에 하나 뿐인 책이 하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기를 쓰고, 자신이 만든 책을 볼 때 마다 최씨는 슬프지만, 이 슬픔을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슬픔을 통해서 대화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슬프다는 건 제가 수영이를 계속 만나고 있다는 뜻이죠”라며 “그러니까 슬퍼도 괜찮아요. 슬프지 않은 게 오히려 더 괴로워요.” 최씨는 지금도 딸 수영씨를 매일 만난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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