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14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에 살던 약 200만 명의 조선인 중 60만~80만 명이 해방 후 귀국을 포기했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한 탓도 있었지만, 미군정이 내건 귀국 조건을 수락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허용한 재일교포의 반출 허용 재산은 현금 1,000엔, 물건 250파운드(약 110kg)였다. 한 마디로 떠나려거든 몸만 가라는 거였다. 징용 끌려온 이들 등 맨몸으로 살던 이들이 아닌 한, 옹색하나마 집 얻고 살림을 시작한 이들 다수가 그렇게 남았다.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에 따르면, 그렇게 남은 재일 조선인 중 상당수는 그간 피압박ㆍ피착취의 원한이라도 풀듯 전승국 국민으로서의 위세를 과시하려 들어 일본인의 원성을 샀고, 점령군의 단속이 덜하다는 이점을 이용해 암시장 등에서 불법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맥아더 사령부 입장에서 조선인 집단은 치안불안 요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치 안정에 치중하던 미군정이 1947년 재일조선인도 일본 교육기본법에 따라 교육받도록 지침을 내린 데는 그런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해방 전까지 조선어 교육을 일절 못 받던 교포 자녀들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등이 각지에 마련한 국어 강습회 등에서 자체 교재로 조선어 학습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 조선인 학교가 일본 전역에 약 500여 곳, 학생수는 6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 문부성이 각 도ㆍ현에 조선인학교 폐쇄 및 일본 정규학교 편입 지침을 내린 건 48년 1월이었다. 조련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교육 수호투쟁이 시작됐다.
오사카ㆍ고베를 중심으로 한 한신(阪神) 지역은 조선인 밀집지역의 하나였다. 효고(兵庫)현청은 48년 4월 10일 조선인학교 봉쇄 명령을 내렸고, 14일 조련 대표단이 현 지사에 공식 항의의사를 전달했다. 일본은 23일 경찰과 헌병까지 동원해 학교 봉쇄 조치를 단행했고, 24일 조선인들이 대규모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군정에 반발하던 일본 공산당이 거기 가세했고, 유사한 일이 오사카에서도 진행됐다. 일본 미군정하의 최초 비상사태로 비화한 ‘한신교육투쟁’은, 엄밀히 말하면 집단 항의시위가 시작된 24일부터 사흘간 이어졌지만, 공식 항의가 시작된 14일부터 치기도 한다. 그 투쟁으로 조선인 학생 등 2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연행됐다.
48년 5월, 일본 문부성과 조련이 일본 교육기본법 내에 사립학교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각서를 교환했다. 재일본 조선인학교가 그렇게 지켜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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