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부산엔 꽃비가 내렸다. 서울에서 막 벚꽃 봉오리가 터지던 날이었다. 영도 흰여울마을 어느 계단에는 복숭아 꽃잎이 발그레한 점을 뿌려 놓았다. 일반적으로 달동네는 큰길에서 언덕으로 올라가지만 부산의 산동네는 도로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집과 마을이 산허리를 가로지른 산복도로 아래에 벽과 벽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서 터를 잡았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경사까지 가팔라 자연스레 계단이 많은 구조다.
부산에서 산복도로는 찻길이 아니라 산동네 마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면 ‘초량동 산복도로’, ‘영주동 산복도로’, ‘아미동 산복도로’라고 대답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단다. 도로 한가운데 집이 있을 리 없는데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부산역 인근 원도심은 대도시를 형성할 만큼 터가 넓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몰려든 사람들이 자연스레 산기슭을 오르며 판자촌을 형성했다. 일거리를 얻기 쉬운 항구와 역에서 가까운 곳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나중에 온 사람들일수록 도심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산항 맞은편 영도 산복도로는 부산에서도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다. 영도다리(공식명칭은 영도대교) 연결 지점에서 시작된 마을은 봉래산(395m)을 중심으로 좌우로 확장됐고, 끝내는 산을 둘러싸다시피 도시가 형성됐다.
영도대교에서 오른편 끝자락 영선동에는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절벽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삶의 터전이 현재는 ‘흰여울문화마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제법 알려졌다. 봉래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절벽에서 흰 포말을 이루며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을 예쁘게 표현한 이름이다.
도심 근접성으로만 매겨지던 땅의 가치는 먹고 사는 문제와 교통난이 해결된 후부터 새로운 조건으로 평가 받는다. 벼랑 끝이라는 가장 열악한 주거환경은 어느새 최고의 바다 전망과 동의어가 되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일조권과 조망권 때문에 다툴 일도 없다.
찻길인 절영로에서 어느 골목으로 내려가도 절벽 끝자락 ‘흰여울길’과 연결된다. 가슴팍 높이의 흰여울길 담벼락 너머로 시선을 옮기면 어느 지점에서든 바다가 보인다. 바다 건너는 자갈치시장과 송도해수욕장이다. 이곳에서 보는 도심은 산복도로를 기준으로 산과 삶의 경계가 한층 또렷하다. 주택이 끝나는 산복도로에서부터 분홍빛 봄이 산등성이로 화사하게 피어 오른다.
왼편 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리면 화물선과 원양어선 등 대형 선박들이 섬처럼 무리를 이루고 떠 있다. 수리나 급유를 위해 부산항을 찾아오는 배들이 잠시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 묘박지(錨泊地)다.
폭 1m 남짓한 가느다란 골목이 이어지는 흰여울길 중간쯤엔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흰여울 안내소’가 자리잡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집이다. 고 김영애가 운영하는 국밥집으로 설정됐지만, 마당으로 들어서는 계단과 집의 겉모습만 나왔을 뿐 실제 국밥집 장면은 다른 곳에서 찍었다. 담장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명대사도 적혀 있다. “니 변호사 맞재? 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생의 마지막까지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지난 주말 세상을 뜬 그의 음성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온다. 안내소 내부는 흰여울마을의 다양한 풍경을 담은 공모전 사진이 전시돼 있다. 멋진 사진을 찍을 요량이면 미리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사실 사진보다 더 멋진 작품은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다 풍경이다. 푸른 물살을 가르는 어선과 맞은편 산자락을 담은 사각의 틀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액자이자 설치작품이다.
흰여울길에는 유난히 화장실이 많다. 1km가 채 못 되는 길에서 공중화장실을 수시로 만난다. 일부는 벼랑 끝 담장을 한쪽 벽면으로 사용한다. 전망으로만 따지면 명당자리지만 단순히 관광객을 위한 시설만은 아니다. 애초 가파른 산비탈에 옹색하게 붙여 지은 집들은 화장실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집을 짓기 힘든 자투리에 공동화장실을 지었다. 한때 한 공간에 2인용 변기까지 있었다니 아침마다 난리를 치러야 했던 산복도로 주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유산이다. 지금도 집 안에 화장실이 없는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흰여울길은 이송도전망대에서 끝이 난다. 이송도는 섬이 아니다. 흰여울마을에서 바다 건너편은 송도해수욕장다. 국내 최초의 해수욕장이기도 한 송도는 1960~7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관광지였다. 영도 주민들은 이곳도 송도 못지않게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송도해수욕장을 ‘일송도’로, 흰여울마을 부근을 ‘이송도’로 불렀다.
이송도전망대에서 지그재그 식으로 설계한 가파른 계단(피아노계단)을 내려가면 절영해안산책로와 연결된다. 맏머리계단, 꼬막집계단, 무지개계단 등도 흰여울길과 해안산책로를 연결한다. 꼬막집계단은 노부부가 살았다는 꼬막만한 집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몸 하나 누일 공간이면 족했던 피난민들의 처지를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산복도로 주택이다. 해안산책로에서 올려다 보면 수직에 가까운 축대 위에 걸쳐진 마을 풍경이 위에서 보는 것보다 더 아슬아슬하다. 애초에 이곳에도 집과 텃밭, 축사 등이 있었는데 1959년 태풍 ‘사라’, 1987년 ‘셀마’ 등에 휩쓸렸다. 영도는 육지로 밀려드는 파도를 고스란히 막아내는 부산의 방파제 구실도 톡톡히 하는 셈이다.
해안산책로는 흰여울마을을 지나 남항대교 아래로 이어진다. 이 부근 방파제에서 뒤돌아보면 그림 같은 흰여울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더러는 이 모습을 그리스 산토리니에 비유하기도 한다. 산복도로처럼 신산한 삶의 흔적이라면 맞는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1,023일간 피난 수도였다.
용두산공원에서 오륙도까지, 영도는 전망대다
영도 봉래산을 기준으로 흰여울마을 반대편 청학동에는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영도구5번 마을버스를 타고 (구)해사고등학교 정류소에 내리면 바로 청학배수지전망대다. 약 3km 거리이니 3명 이상이면 택시를 타는 편이 낫다.
영도 산복도로는 도심보다 높고 가파르고 복잡하다. 영도 전체가 전망대라 해도 틀리지 않다. 청학배수지까지 가는 길에도 낮은 건물 사이사이로 도심과 바다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2층 목재 덱으로 만든 전망대는 마을공원 수준이지만, 주민들보다는 색다를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에게 더없이 좋은 장소다.
전망대에는 말 한 필과 농부 동상이 서 있다. 각각 ‘영도의 절영마’, ‘조내기 고구마를 짊어진 농부’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농부의 지게에는 고구마가 가득 담겨 있다. 영도는 1763년 조선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다. ‘조내기 고구마’는 바로 ‘조엄의 고구마’를 뜻한다. ‘절영마’ 동상의 사연은 더 오래됐다. 영도는 삼국시대부터 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국마장(國馬場)이었는데, 이곳의 말이 그림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빨라 특별히 ‘절영마’라 불렀단다. 절영(絶影)은 영도의 옛 지명이다.
동상 앞으로는 부산의 산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감만동과 영도를 잇는 부산항대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용두산공원부터 오밀조밀한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으로는 신선대부두에서 육지 끝자락의 오륙도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한없이 복잡하기만 한 부산 원도심의 지형과 바다물길도 대충 파악이 된다.
부산=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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