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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패러다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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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패러다임 전쟁

입력
2017.04.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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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운동법칙을 알아내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스승 브라헤가 남긴 데이터로부터 화성의 공전궤도가 타원임을 알아내기 위해 케플러는 2절지 수백 장에 걸쳐 수십 번을 반복해서 계산했다고 한다.

케플러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해묵은 심상인 귀납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이다.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수성의 공전궤도가 100년에 43초 정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현상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었으나 20세기 초반까지도 뉴턴의 중력이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은 뉴턴의 역학체계를 유지한 채 관측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수성과 태양 사이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행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2011년 유럽원자핵연구소(CERN)에서 중성미자라는 소립자를 연구하던 한 연구진은 중성미자가 광속보다 빨리 날아갔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해 학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에서 광속보다 빠른 물리적 신호는 있을 수 없다. 당시 많은 과학자들은 실험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몇 개월 뒤 컴퓨터에 연결하는 광케이블의 접속불량 때문에 시간 측정에 오류가 생겼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이 공유하는 총체적인 가치체계로서의 패러다임이라는 토마스 쿤의 개념을 빌려 쓰자면, 지배적인 패러다임 속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관측 결과도 자신이 속한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기존 패러다임의 예측과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그 패러다임을 즉시 폐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수성궤도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915년의 아인슈타인이었다. 새로운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해 아인슈타인은 태양이 만드는 시공간의 곡률이 수성의 궤도를 100년에 43초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경쟁하는 패러다임이 출현한 셈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낡은 패러다임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상을 예측해 숱한 검증을 통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낡은 패러다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뉴턴의 중력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아주 특별한 경우로 포함돼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중력이론을 극복하면서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을 각각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보면 상식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허물은 대체로 모른 체하는 반면 상대 후보의 허물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지하는 후보(패러다임)에 불리한 팩트가 나온다고 해서 쉽게 그 후보(패러다임)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에 대해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이명박 후보는 결정적인 동영상이 공개되었음에도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구조로서의 패러다임은 한 방에 훅 가지 않는다.

2012년 대선 때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화제였다. 굳건하던 박근혜 대세론에 금을 내기 시작한 것도 ‘안철수 현상’이었다. 안철수는 이번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세론에 금을 내고 있다. ‘안철수 패러다임’에는 장점이 있다. 기존의 성장 패러다임은 항상 부정부패를 동반했으나 안철수는 (검증이 필요하긴 하지만) 사악하지 않은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성장과 안보는 보수의 아젠다였고 이에 맞서는 진보의 아젠다는 분배와 민주였다. 이제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안철수 현상은 보수와 진보의 허구적인 대립구도에 염증을 느낀 민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 민심의 본질은 기존의 보수와 진보를 극복하면서 아우르는 포괄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도 결국 승리한 패러다임은 극복과 포괄의 패러다임이었다. 현실의 안철수가 ‘안철수 현상’을 이어가려면 이런 본질을 명확히 간파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단순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식이 예컨대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식의 사안별 갈라치기로 전락한다면 시대적 요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한편 문재인은 기존의 보수ㆍ진보 대립구도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라 불리한 면이 있다. 박근혜ㆍ문재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던 지난 대선은 낡은 보수, 낡은 진보가 마지막으로 맞붙은 선거일지도 모른다. 낡은 대립구도는 상호배제적 패러다임의 충돌이었다. 문재인의 적폐청산을 이 연장선에서 받아들이는 유권자도 적지 않다. 청산이 구질서의 파괴로 끝나지 않고 신질서 창조의 시작이 되려면 최소한의 비전과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포괄적 패러다임에서는 보수의 아젠다로 여겼던 성장과 안보문제도 껴안고 가야 한다. 아니, 새로운 시각으로 안보개념도 21세기에 맞게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극복과 포괄의 길은 지금까지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기존의 보수ㆍ진보라는 입장에서 기존의 진보ㆍ보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온전한 극복도 넉넉한 포괄도 힘들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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