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누가 뭐래도 <삼국지연의>의 어엿한 주인공이다. 유비, 관우 등도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조조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은 아니다. 교활한 간웅이란 이미지를 벗겨내고 보면 그의 활약상은 사실 제갈량 못지않다. 영웅이라 칭할 만하다는 뜻이다.
소설에서만이 아니다. 역사에서도 그는 ‘된사람’은 아니었을지라도 ‘난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정치와 경제, 군사 같은 실무는 물론 문학과 학술 방면에서도 쏠쏠한 족적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위무제주손자(魏武帝注孫子)>라는 병법서다. 서명은 “위나라 무제가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아 해설했다”는 뜻이다. ‘무제’는 아들 조비가 조조를 황제로 추존하며 올린 시호다. 훗날 손무의 책이 소실됐으니, 오늘날 <손자병법>을 볼 수 있게 된 데는 조조의 이 책도 나름 기여한 셈이다. 아무튼 소설에서는 이를 간웅 이미지에 맞게 비틀었다. 이렇게 말이다.
훗날 유비의 본거지가 된 촉 땅에 장송이란 자가 있었다. 역량이 출중했음에도 흉한 외모 탓에 중용되지는 못했다. 당시 촉은 유장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유비에게 촉을 빼앗길까 두려워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언변도 좋고 담력도 센 이를 보내 조조를 설득해야 했다. 물색해 보니 장송만한 인물이 없었다. 외모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를 조조에게 보내기로 했다. 한편 장송은 유장이 다스리는 촉에는 미래가 없다고 여겨왔다. 하여 조조에게 촉의 운명을 걸어보기로 하고 상세하게 그린 촉 지도를 간직한 채 조조를 알현했다. 듣던 대로 조조가 영웅이면 지도도 바치고 촉의 내밀한 사정도 고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조조도 흉측한 외모를 보고는 그만 그를 홀대하였다. 휘하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양수란 책사만이 비범함을 간파하고는 그를 연회에 초대했다. 주흥이 무르익었을 즈음 양수는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조조를 상찬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지은 <맹덕신서>도 보여줬다. 이런 탁월한 병법서도 지었다며 한껏 추켜세울 요량이었다. 조조에게서 마음이 떠났던 장송은 책을 받아 들고 쓱 훑어보더니 크게 웃어 젖혔다. 촉 땅에선 어린 애들조차 훤히 아는 내용을 두고 어찌 훌륭한 병법서 운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곤 책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읊조렸다. 훑어볼 때 외워놓고는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듯 술술 암송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양수는 마음이 급해졌다. 빼어난 인재를 잃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날이 밝자마자 조조를 찾아가 장송이 대단한 인재였음을 낱낱이 고했다. <맹덕신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도 아뢰었다. 그러나 마음이 떠난 건 장송만이 아니었다. 조조 또한 장송이 마뜩하지 않았던 차라 촉 땅 사람들이 자기 책을 보고 깔깔대며 비웃는 장면이 뇌리에 가득 차 올랐다. ‘내 책이 나의 출중함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든다?’ 순간 이성을 상실한 조조는 <맹덕신서>를 깡그리 거둬들여 태워버리라고 명했다. 자존심에 굵은 생채기가 패였음이다. 이런 낯 뜨거운 일을 절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책을 쓰는 것은 옆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래로는 미래의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능동적 활동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여기의 천하와 장차 펼쳐질 미래의 역사에 자기 목소리를 새겨두는 적극적 행위다. 게다가 책을 씀으로써 세상과 역사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드높일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이는 좋은 책을 썼을 때의 얘기다. 그런데 좋은 책이 아닐지라도 책을 쓰는 데엔 꽤 많은 품이 들어간다. 정신과 노동, 시간, 재화 등이 제법 투여된다. 고작 천하의 웃음거리나 되자고 책을 쓰는 짓은 제 정신이라면 어지간해서는 안 한다는 얘기다.
공자는, 후생은 두려운 존재라고 했지만 나이 40, 50이 되어서도 이름이 칭해지지 않으면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고 단언했다. 또 친구 원양에게 “어려서는 공손할 줄 모르고 커서는 칭해지는 바가 없으며 늙어서는 죽지 않고 있음이 바로 도적”이라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때리기도 했다. 한자권에서는 자기 명예를 발양하려는 의도적 행위를 백안시해왔다. 자신이 괜찮게 살면 이름은 자연스레 칭해지는 것이지 그걸 얻고자 극성스레 노력하는 건 아니라고 봤다. 대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爲天下笑)” 것은 어떡하든 피하려 했다. 아무리 함량 미달의 군주라도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하면 정말 하고 싶었던 일도 멈출 정도였다.
얼마 전 광주민주화항쟁을 짓밟고 군부독재를 연장한 부부가 회고록을 출판했다. 굳이 책을 써서 자신을 천하의 웃음거리로 내던진 셈이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짚어보니 결국 돈이 사달을 낸 듯하다. 전 재산 29만 원으로 벌써 20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회고록이라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려 했던 듯싶다. 쿠데타도 해봤고 민주화도 압살해 봤는데 천하의 웃음거리 정도야 무슨 흠이 되겠는가. 더구나 돈까지 되는데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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