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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망을 적어 ‘봄’

입력
2017.04.0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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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서 '부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부러워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다. 한 번 마음 먹은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자주 다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들고 있는 명품 가방이 부럽고, SNS를 도배하는 한가한 해외 여행이 부럽고, 화려한 레스토랑의 값비싼 코스요리가 간혹 부러웠다. 그 무엇보다 갑에게 굽실거리거나 애써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 없는 건물 주인이나 재벌 2세가 부러웠다. 출퇴근 시간, 달랑 4량뿐인 9호선의 아수라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유한마담과 한량이 부러웠다.

도시에 나가 돈을 버는 것보다 마을에 남아 꽃을 즐기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기는 히말라야 브록파 마을 사람들을 소재로 만든 아웃도어 웨어 광고가 있다. 2013년 블랙야크 TV 광고의 무대는 브록파 마을이다. 광고 속의 여인들은 꽃 물결 가득한 들판에서 서로의 머리에 정성스레 꽃을 꽂아 준다. 투박한 꽃다발을 만들어 들고 환하게 웃는다. 촌스러운 옷차림인데도 그들이 만드는 풍경은 환하고 풍요롭다. 광고 카피를 보자.

NA) 봄이 사람 위에 피다.//히말라야 브록파 마을에 꽃이 피었습니다.//여기 꽃으로 행복한 꽃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가져야 행복하다 믿지만/이들은 가진 것만으로도 늘 행복합니다.// 돌아가면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보겠습니다.

자막) 힐링 in Himalaya/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다] (2013년 블랙야크 TVCM 카피)

카피가 못 가진 것에 대한 욕심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봄꽃 수다가 와글대는 들판에 나가 공짜 햇살을 흠뻑 쐬고 싶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좋은 차나 넓은 집이 부럽지 않다고 큰소리치진 못하겠다. 하지만 이 봄에 가장 부러운 것은 앞뒤 재지 않고 피어나는 꽃송이들의 무조건, 새 잎 내기 위해 뿌리부터 힘을 모으는 가로수들의 몰입, 지구를 덥혀 두꺼운 외투를 벗게 하는 태양의 뜨거움이다. 미장원에 가지 않아도 아름다운 브록파 여인들의 충만함이다. 무조건 뜨겁게 몰입해서 스스로 가득 차는… 무모한 것들, 설레는 것들이 두둑한 통장보다 훨씬 더 부럽다.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본다. 활짝 봉오리를 연 목련이 보이고 연두빛 물이 오른 가로수가 보이고 한결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소월의 시 ‘바람과 봄’이 어김없이 생각난다.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작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소월은 봄꽃 피어나니 술잔을 들었을 테고 꽃잎 진다고 또 술잔을 비웠을 것이다. 바람 불고, 하양 노랑 분홍 꽃들이 다투어 피니 향긋한 술 생각 절로 나고, 보드라운 봄바람 불어오니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블랙야크의 카피와 소월의 시가 어깨를 다독이며 부추기는 것 같다. 이 봄, 알량하더라도 가진 돈과 목숨을 물쓰듯 낭비하라고, 다음 봄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르니 지천에 흐드러진 이 봄을 만끽하라고…

먼 도시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1주일 연속 술잔을 기울이고, 밤새워 드라마 열 편을 몰아 보고, 섬진강변 오두막에서 봄꽃 다 피고 질 때까지 딱 한 달만, 더도 말고 딱 서른 날만 살았으면 좋겠다. 노후대책쯤은 코웃음 치며, 성인병 걱정일랑 개나 줘버리고 소박하지만 흥청망청한 살림을 차렸으면 좋겠다. 오십 년 넘게 ‘해야 하는’ 일들에 매여 집과 학교와 사무실을 오갔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며 떠돌았으면 좋겠다. 다시 책상 위 모니터로 돌아와야만 하는 처지에선 쉽게 하기 힘든 일들이다. 그래도 봄의 유목민이 되는 황홀한 소망을 아주 지우지는 않고 맘 속에 적어둔다.

(2013년 블랙야크 TVCM 스토리보드)

(2013년 블랙야크 TVCM 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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