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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세상 설계할 뿐" 청년 박철상의 기부학 개론

입력
2017.04.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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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선 한국의 ‘청년 워런 버핏’이란다. 투자로 돈을 벌어 거액을 기부하는 모양새가 닮았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 청년’은 고액 기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게 그의 목표다. 그런 면에선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에 가깝다.

지난해 포브스지는 ‘이 청년’을 아시아 기부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것도 틀렸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다. 혼자 동분서주하는 영웅은 세상을 구했을지언정 바꾸진 못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 청년은 영화 엑스맨 시리즈의 찰스 자비에와 비슷하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관계와 연대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그렇다.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박철상(33)씨 얘기다.

“뭐야, 이 사람? 몇 살인데 돈이 이렇게 많아? 정계 진출하려는 거 아냐?”

수백억대 자산가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수십억,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를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나선 박씨에 대해 설명하면 대부분의 반응이 이랬다. 그의 독특한 삶의 이력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박철상’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박철상 사기’가 뜰 정도니,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행보를 기이하고 비현실적으로 느낀단 얘기다. 인터뷰가 성사된 뒤, 기자 역시 무슨 면접관이라도 된 기분으로 박씨의 선의를 ‘검증’할 참이었다.

지난 2015년 4월 3일 영남일보 지면. 박철상씨의 첫 언론 인터뷰다. 그는 그 해 2월 경북대에 복현 장학기금 설립을 위해 4억 5,000만원을 기탁하기로 했다. 이후에 자신의 진의가 왜곡될까봐 언론 인터뷰는 삼갔다.
지난 2015년 4월 3일 영남일보 지면. 박철상씨의 첫 언론 인터뷰다. 그는 그 해 2월 경북대에 복현 장학기금 설립을 위해 4억 5,000만원을 기탁하기로 했다. 이후에 자신의 진의가 왜곡될까봐 언론 인터뷰는 삼갔다.

프롤로그 : ‘박철상 33년 인생’ 간단 요약

최근엔, 박씨의 이름은 몰라도 ‘경북대생 고액 기부자’라고 하면 반색하며 알은 체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는 현재 10개의 기금을 운영하며 매년 대학생ㆍ고등학생 360~37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의료기금, 위안부 피해자 돕기와 취약계층 지원을 합치면 1년에 8억원 이상을 기부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기부의 삶’으로 이끌었는지, 간단히 그의 삶의 이력을 되짚어보자.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대입 무렵 가세가 기울어 원하는 대학에 못 갔다. 아버지가 타지까지 보내 고학을 시킬 순 없다며 반대해서다. 노력이 배신당했단 생각에 좌절하고 분노했다. 그는 패배의식과 박탈감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군대를 터닝포인트로 삼았다. 책을 읽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했고, 그 고민들을 잊지 않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수양록(군대 일기장)을 썼다. 그 결과, 자기 삶에 대한 억울함 대신 자신보다 못 가진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싹텄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가정 형편 때문에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돈은 생각보다 빨리 모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생 때 시작한 모의투자가 진가를 발휘했다.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학비라도 미리 벌어놓자는 생각에 처음으로 실제자금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끼니를 굶어가며 악착같이 마련한 종잣돈 1,500만원은 군 제대 후 2억이 됐다.

학업과 투자를 병행하던 그는 2013년 첫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6~7시간씩 알바를 하던 한 대학 후배의 황망한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해 ‘나이가 들면’ 기부를 하겠다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바로 장학기금 설립에 나섰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한 투자는 하지 않는다. 목표한 액수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평생 돈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벌어놓은 그는 이제 ‘사람 투자’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기습 방문한 박철상씨의 집. 그는 대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산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기습 방문한 박철상씨의 집. 그는 대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산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제1장: 생각을 만든 값진 경험들

애초 인터뷰 약속 장소는 카페였다. 첫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사진 촬영을 위해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가 안내한 곳은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그는 그간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희생해서 기부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해왔다.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남는 돈으로 기부한다는 얘기다. ‘역시나 집도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인터뷰 끝날 때쯤에서야 오해가 풀렸다.

“사실 저 혼자 살기엔 집이 크죠. 제가 살 집이 아니라 나중에 저 유학 가면 부모님 지내시라고 제가 미리 살아보고 있는 거에요. 아무 집에서 사시라고 할 순 없잖아요.”

부모님 모실 집에 본인이 미리 살아보는 것처럼 박씨에게 ‘경험’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그의 삶을 훑어보면 ‘왜? 어떻게?’의 연속이지만, 의문의 대부분은 그의 경험 속에 답이 있다. 직ㆍ간접 경험을 통해 가치관을 형성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박씨가 남들과 다른 점은 경험이 공감과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부모님 덕을 많이 봤어요.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게 어려운 사람 모른 체 하지 말라는 거였으니까요. 어렸을 때 목욕탕에 가면 아버진 늘 혼자 오신 어르신들의 등을 밀어 주셨어요. 폐지 주우러 다니는 분들에겐 따뜻한 밥 드시라고 주머니에 5,000원짜리 한 장 넣어드리는 분이세요. 저도 평소엔 현금 쓸 일이 거의 없지만 5만원짜리 몇 장은 늘 가지고 다닙니다. 가끔 버스 타고 가는 길에 폐지 리어카 끌고 가는 분들 보이면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몰래 주머니에 넣어드리곤 해요. 다 보고 배운 거죠.”

박씨에게 경험이 습관이 된 대표적인 사례는 독서다. 그는 굳이 투자 성공 비결을 꼽자면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 거시경제의 흐름을 읽는 눈이 남들보다 정확했다고 했다. 그가 책을 접한 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어요. 할아버지 댁에 가면 전부 책밖에 없었죠. 제 기억으론 유치원 때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칸트, 헤겔, 데카르트 같은 책들을 읽었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어느 정도 한자를 읽게 되면서 데카르트를 빌려와 다시 읽었어요. 그 때 엘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같은 미래학자, 경영학자 책들과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태백산맥 같은 소설들도 읽었어요. 당시엔 무슨 의미인지,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도 모르고 읽었죠. 고등학교 가서 이 책들을 다시 읽었어요. 그제서야 어렴풋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박철상씨의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 거실엔 이 만한 책장이 하나 더 있다. 본가인 울산에 훨씬 더 많단다. 이 책들 중에 세로 쓰기 시절 출판된 책도 있었는데, 절판된 책이어서 어렵게 구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박철상씨의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책들. 거실엔 이 만한 책장이 하나 더 있다. 본가인 울산에 훨씬 더 많단다. 이 책들 중에 세로 쓰기 시절 출판된 책도 있었는데, 절판된 책이어서 어렵게 구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제2장: 책에서 배운 삶을 좇다

박씨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일종의 놀이고, 어느 순간 그의 삶의 일부가 돼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3,000권 가까운 책을 읽었고, 매년 150권 가량의 책을 읽는다.

그에게 독서는 지식을 쌓는 방편도 아니고, 주식투자의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거꾸로 책을 읽다 보니 지식이 쌓이고 혜안도 생긴 거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얻는다는 점. 그는 군대에서 작정하고 책을 읽었다.

“군 입대 직전에 제 속에 화가 너무 많이 쌓여 있었어요. 입시에서 노력했던 결과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억울함, 불평불만에 갇혀 있었죠. 이대로라면 도저히 패배의식과 박탈감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군대를 터닝 포인트로 삼았죠. 군 생활 동안 책을 200권 이상 읽었는데, 짬이 날 때마다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반추하고 제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궁극적으로 저 스스로를 반성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고민들을 잊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다시 일기를 썼고요. 훈련소 입소날부터 전역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썼어요. 스크루지가 꿈을 꾸고 나서 새 삶을 살았듯 제게 군대는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과 같은 거죠.”

그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건, 어느 한 순간의 결정적 사건 때문이 아니다. 군대용 일기장이 ‘수양록’인 것처럼 그가 군대(공군)에서 보낸 2년 3개월은 자기 수양의 시간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군대에서 현대사 책을 많이 읽었어요. 독립ㆍ민주화운동 하신 분들,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하신 분들의 삶을 많이 접했죠. 독립운동가 중에 이회영 선생의 삶을 군대에서 알게 됐어요. 엄청난 부자였던 선생은 어찌 보면 더 큰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이역만리에 가서 목숨을 던지셨어요. 6형제 대부분이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런 걸 보면 제 생활은 부끄러울 따름이었죠. 이회영 선생뿐만 아니라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선생 같은 분들의 삶을 접하게 됐어요. 그 분들은 부나 명예를 바라고 목숨을 던지신 게 아니잖아요. 그 분들의 희생 덕에 지금과 같은 환경이 조성된 거고, 전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 환경을 물려받아 제가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무임승차자인 거에요. 제가 이렇게 기부를 하고 남을 살피려는 건 무임승차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이고요.”

이회영 선생의 삶은 유명한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 최대 부호 중 한 명이었던 이회영 선생은 자비를 들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전 재산을 조국 독립에 바쳤다. 최동훈 감독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을 읽고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암살’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박씨가 이회영 선생 외에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는 사람이 두 명 더 있다. 독립운동가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 선생과 유한양행 창업자이자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뿐인 아들이 아닌 사회에 환원한 유일한 선생이다. 다음은 순서대로 이회영, 김준엽, 유일한 선생을 다룬 ‘지식채널e’의 유튜브 영상들이다.

그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뜻을 제대로 살피며 살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한다. 지금도 김준엽 선생의 다섯 권짜리 자서전 ‘장정’은 1년에 두 번씩은 반드시 정독한다고 했다.

“유일한 선생은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셨어요. 자식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서 그러셨을 거에요. 돈 몇 푼보다 정말 중요한 것, 건강하고 따뜻한 세상을 물려주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셨을 거에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사회는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공동체는 무너져가는 데 큰 부를 물려준다는 건 돈 가방 들려서 할렘가에 던져놓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요? 물질적인 부보다는 건강하고 따뜻한 세상을 물려주려고 평생 노력할 생각입니다.”

제3장: 투자에서 배운 인생의 좌우명

이만하면 박씨가 왜 기부하는 삶을 살게 됐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돈이란 벌수록 더 벌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그는 깔끔하게 차려 입었지만 명품은 없고, 외제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자산가다. 목표한 액수를 벌었으니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한 투자를 하지 않겠다니. 게다가 30대 초반의 창창한 나이에 말이다. 그는 투자를 통해서 두 가지 좌우명을 세웠다고 했다.

“주식투자를 하면서 금전적 이익보다 내적으로 성숙해졌다는 게 제겐 더 큰 결실이에요. 제 첫 번째 좌우명은 관인엄기(寬人嚴己)입니다. 남에겐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라는 뜻이에요. 투자를 하다 보면 교만에 빠질 때가 있어요. 제 생각대로 착착 돌아갈 때죠. 그러다 한 번씩 꼭 얻어맞더라고요. 경제시장은 변수와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공간. 따라서 여기에 대응하려면 끊임 없이 부족한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죠. 교만해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요. 겸손만이 금융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두 번째 좌우명은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이에요.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 아들에게 써 준 ‘계자서(誡子書)’라는 글에 나오는 문구죠. 욕심이 없어야 뜻을 바로 세울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야 그 뜻이 멀리까지 미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절제와 평정심을 강조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투자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이에요. 결국 투자는 멘탈 싸움이고, 욕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되죠.”

박씨는 투자에서 배운 철학을 삶에 접목했다. 스스로 ‘도덕적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겸손하다. 그의 얘기가 공자왈 맹자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삶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박철상씨는 주변에서 누군가 주식투자를 하겠다면 도시락 싸다니며 말리겠다고 했다. 주식에 신경 쓰느라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펀드 등 간접투자를 이용하되 국가적으로 이들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박철상씨는 주변에서 누군가 주식투자를 하겠다면 도시락 싸다니며 말리겠다고 했다. 주식에 신경 쓰느라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펀드 등 간접투자를 이용하되 국가적으로 이들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제4장: 기부를 통해 꿈꾸는 ‘유토피아’

박씨는 다음 세대에 건강하고 따뜻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개인에겐 수십, 수백억원이 엄청난 돈 일진 몰라도, 그 돈이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다. 그는 ‘기부 릴레이’를 구상하고 있다. 영화 속 영웅처럼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길 순 없다. 기부를 받은 사람은 또 다른 기부자가 돼야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제가 운영하는 장학기금에서 장학생을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인성이에요. 단순히 장학금을 주고 받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자신이 받은 만큼 환원할 수 있는, 약자를 품을 수 있는 인성을 갖추었는지를 보는 거죠. 단순히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장학금을 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거나 사회적 낙인으로 기능할 우려가 있어요. 성적이 좋다고 장학금을 주면 용돈 취급 밖에 안되죠.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어요. 병아리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같이 쪼아야 껍질을 깰 수 있단 뜻이에요. 힘든 환경 속에서도 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삶의 의지도 있는 친구들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장학금을 신청할 때 에세이를 받아서 면밀히 검토하고, 부족한 부분은 교수님이나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인성을 가늠합니다. 하지만 과정은 치열하게 하되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혹여 결과가 실망스럽다면 기부 자체에 회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박씨는 돈으로 하는 기부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힘든 친구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외로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가 10억원의 돈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열정은 이미 결실을 얻고 있다. 그의 생각을 공유한 600명 이상의 장학생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나름대로의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장학생 면접을 본 친구들에게선 손 편지와 메일도 수백통을 받았다. “장학금은 못 받았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 “사회에 나가서 좋은 직업 얻고 돈 많이 버는 게 꿈이었는데, 남을 살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사회적으로도 반향이 있다. 한 대기업 사회 공헌 재단과 한국장학재단 등에서 기부의 미래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기금의 장학생들 사례를 참고하고 싶다는 것이다.

박씨가 그리는 기부는 돈이 아니라 관계에 방점이 찍혀있다. 돈은 그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 그는 장학금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또 실제로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잔잔한 휴먼스토리 영화로 잘 알려진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는 그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원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인간의 결핍이 가능성이 되려면, 악다구니보다 나약함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건강한 관계’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씨와 고레에다 감독의 생각은 상통한다.

“제일 무서운 건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는 거에요.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어린 친구들에게 ‘누군가는 너의 노력을 알아주고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장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100만원, 200만원 하는 장학금보다 훨씬 중요한 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이 학생들은 어디 가서 얘기할 곳이 없어요.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고민을 들어는 줄 수 있을진 몰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는 힘드니까 얘기 꺼내기가 쉽지 않아요. 간호사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이 있으면 간호학과 학생을, 선생님이 되고 싶은 친구에겐 사범대생을 소개시켜줘요. 장학생들끼리 혹은 제 인맥을 통해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도록 말이죠. 혹시 장학생 중에 기자를 꿈꾸는 학생이 있으면 기자님을 소개시켜 드려도 될까요?”

박철상씨 머리 위에 있는 ‘사랑이 가득한 마을’이 그가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는 복현장학금 설립 취지문에서 “하나의 나뭇가지에서 여러 개의 가지들이 뻗어나가듯 수천, 수만 개의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나가길 희망한다”며 “단순한 기부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아닌, 이 나무가 건강하고 튼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함께 가꾸어갈 동료를 구하는 마음”이라고 적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박철상씨 머리 위에 있는 ‘사랑이 가득한 마을’이 그가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는 복현장학금 설립 취지문에서 “하나의 나뭇가지에서 여러 개의 가지들이 뻗어나가듯 수천, 수만 개의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나가길 희망한다”며 “단순한 기부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아닌, 이 나무가 건강하고 튼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함께 가꾸어갈 동료를 구하는 마음”이라고 적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에필로그: 당신도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박씨는 자기가 정말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이 이토록 가치 있게 쓰일 수 있게 해준 장학생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 의심하고 헐뜯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닌 보듬고 나누며 행복한 사회가 책 속에만 존재하는, 현실과 괴리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가 본받았던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생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어린 친구들에게 모험하라, 도전하라고 하는 얘기들 정말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 들었을 때 제일 화가 나요. 자기들이 불안정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넘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이 무조건 도전하라니요. 전 그들이 맘껏 모험하고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평생 묵묵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이런 노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선조들이 물려주신 환경의 덕분이에요. 북한이나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박씨는 예정돼 있던 유학을 몇 년 미뤘다. 거시 경제를 읽는 그의 눈에 앞으로 몇 년간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에게 더 혹독한 시간이 될 거란 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부 시스템을 탄탄히 다져놓을 때라고 판단했다. 전남대에 대구 지역을 벗어난 첫 기금을 만든 것도 늦기 전에 안전망을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결국 그는 유학을 떠날 것이다.

“철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학문이잖아요. 제가 사회에 기여할 만한 학문적 소양을 갖췄다고 느껴질 때 돌아올 겁니다. 교육 쪽으로 기여하고 싶어요. 사실 제가 유학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제가 한국 사회에서 떠나 있는 동안 제 이름 석자가 좀 잊혀졌으면 하는 거에요. 지금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워낙 특이해서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사람이 많아요. 사기꾼이니 뭐니 별 소리 다 들어봤어요. 첨엔 억울했는데, 결국 남에게 비치는 건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도 저라는 사람이 아닌 제가 꿈꾸는 세상을 바라보려면 제가 잊혀지는 게 최선이겠죠. 사회적으론 제가 세상 떠날 때까지 마음, 시간, 재원 모두 쏟아 부어서 따뜻하고 건강한 사회 만드는 것, 개인적으론 언젠가 아이를 배에 올리고 낮잠 자는 게 제 꿈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공덕동 족발 골목에서 후배들과 술을 한잔 했다. 껌 파는 할머니께서 테이블로 오셨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살게요. 아니, 얼마죠? 껌 두 개 주세요.” 언젠가 박씨가 기자 지망생 학생을 소개시켜 준다면 그 학생에게 기꺼이 기자의 실상을 낱낱이 털어놔 주겠다고 결심했다.

대구=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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