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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박수경 “대한민국을 ‘국악 한마당’으로 만드는데 힘 보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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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박수경 “대한민국을 ‘국악 한마당’으로 만드는데 힘 보탤래요!”

입력
2017.04.0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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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를 잡고 포즈를 취한 국악인 박수경씨.
부채를 잡고 포즈를 취한 국악인 박수경씨.

“국악 대중화의 기치를 내걸고 질풍노도의 20대를 보냈죠. 사서 고생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대구를 중심으로 지역을 휘젓다시피 한 국악 팀이 있었다. 2002년 ‘악동’으로 출발, 2004년에 10여 명이 모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여음’이다. ‘여음’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박수경(36)씨는 “소리를 비롯해 거의 모든 국악기 연주자가 포함된 대규모 프로젝트 팀이었다”고 밝히면서 “젊은 피들이 모인 만큼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오케스트라 팀보다는 작았지만 이들이 일으킨 음악적 소동은 그 이상이었다. 결성한 이듬해부터 3년 남짓 유럽과 아시아의 중소도시를 돌면서 버스킹과 무대 공연을 펼쳤다. 파리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공연할 땐 객석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나이트클럽에서도 공연을 펼쳤다. 2005년, 홍대도 아닌 대구 동성로에서 벌인 일이었다. 비난도 많았지만 그 덕에 마니아 팬들도 많이 얻었다. 무대를 가리지 않았다. 축제의 계절에는 한 달에 50회 이상 공연을 펼쳤다. 박씨는 “불러주면 기꺼이 가고, 안 불러줘도 흔쾌히 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닌 덕분”이라고 밝혔다.

지역에서 최초로 MR을 만들었다. 소란한 야외 공연장 등에서 쓸 요량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대학교 은사가 박씨를 호출했다. 국악의 격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몇 년 후 그 은사도 MR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MR에 관한 한 지역에서 개척자가 된 셈이다.

‘여름’의 활동이 뜸해진 것은 2010년을 넘어가면서였다. 멤버들이 모두 서른 즈음의 나이로 들어섰고 결혼이나 취업을 하면서 연주 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박씨도 그 즈음 결혼을 해서 자연스럽게 팀이 해체됐다.

“혼자가 되긴 했지만 음악은 변함없이 제 삶 자체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20대가 산처럼 높은 열정이었다면, 지금은 강보다 깊은 사랑입니다.”

소리꾼과 교육자로서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틈 날 때마다 무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해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신년 음악회에서 사회를 보는 동시에 소리 한 대목을 공연했다. 오페라하우스 역사상 최초의 국악 공연이었다. 공연과 함께 틈틈이 제자를 양성하면서 2016년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 소리를 보급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어서였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예술 강사로 활동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진학하면서 유치원생과 학부모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2013년 대구 달성군 다시 지역으로 이사했다. 박씨가 사는 동네에 들어서면 놀이터에서 소리 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모두 박씨의 꼬마 제자들이다. 유치원뿐 아니라 인근 초등학교에도 소리 반을 만들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다. 얼마 전 달성군에서 열린 ‘송해가요제’에 학부모로 팀을 꾸려서 무대에 올렸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소리를 가르친 초등학생이다. 5년 전쯤에 전화가 걸려와 “서울에 있는 모 간호학과에 지원을 했는데 면접에서 1등을 했다”고 말했다.

“면접관이 느닷없이 ‘장기가 뭐냐’고 묻길래, ‘판소리 잘합니다’ 하고는 소리 한 대목을 했답니다. 간호학과 면접이었는데 판소리로 1등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가르친 보람을 느꼈죠, 호호!”

박씨는 “우리 DNA 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흐르고 있다”면서 “어릴 때 국악을 배우면 전문 국악인이 안 되더라도 국악을 지탱하는 튼튼한 뿌리의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씨앗을 뿌릴 거예요. 지금은 다사에 살고 있지만,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든 꾸준히 주변 사람들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전파할 생각합니다.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이지만, 언젠가 싹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 소리의 중요한 토대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제가 국악으로부터 얻은 위로와 삶의 희열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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