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를 파고든지 10년이 넘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논어를 10년씩이나 붙들고 있는 이유가 뭔가?” 그 때마다 말한다. “너무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 “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왕학이고 동시에 제왕이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주는 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자의 영향 때문에 그저 선비들의 마음 다스림 교양서 내지 처세술 정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대부분 “논어가 제왕학이라고?”라며 의심의 눈길을 숨기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논어는 원래 제왕학의 텍스트였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가 예습 복습 잘 하라는 수험생의 학습지침이겠는가? 매사 열렬하게 배워 익히는 것을 싫어하지 말고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일 때라야 주변에 있는 훌륭한 신하들이 임금에게 다가와 스승의 역할을 자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엄청난 고전의 첫 머리를 차지한 것이다. 임금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떤 신하가 감히 다가가서 임금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임금이 먼저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할 때라야 가능하다는 무서운 가르침인 것이다.
제왕학으로서 논어가 제시하는 일관된 리더십상(像)은 강명(剛明)이다. 강명한 군주라야 임금다운 임금이 될 수 있다. 먼저 강(剛)이다. 강은 마음이 굳세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공자가 “나는 아직 진정 마음이 굳센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신정(申棖)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답한다. 신정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을 통해 어떤 인물인지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정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 어찌 마음이 굳센 사람이겠는가!”
마음이 굳센 사람과 욕심이 많은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대선 때 유권자들의 고민도 거기에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사이비(似而非), 즉 겉으로는 마음이 굳센 사람과 비슷하지만 그 속은 전혀 아닌 사람이다. 참고로 사이비(似而非)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며 사람을 알아보려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형이 바로 사이비다.
이번에는 명(明)이다. 명은 눈 밝은 사람이다.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제자 자장(子張)이 명(明)의 의미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서서히 젖어 드는 동료들 간의 중상모략, 살갗을 파고드는 측근들의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정사는 밝다(明)고 이를 만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강(剛)과 명(明)은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임금됨의 원칙이었다. 수시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강(剛)일 수 없으며 주변에 아첨꾼들을 들끓게 하는 사람이 명(明)일 수 없다. 이성계는 건국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어리석은 군주다. 결코 강명한 군주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그가 1400년 11월 이방원이 드디어 형님 정종의 권력을 이어받아 대위(大位)에 오르던 날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강명(剛明)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기지 않을 것이다."
이 말 앞에 ‘내 권력을 앗아간 괘씸한 아들이긴 하지만’, 혹은 ‘다른 것 몰라도’라는 부분을 넣어 읽어야 온전한 의미가 통한다. 강명하지 못했던 한 전직 대통령을 지난달 마지막 날 감옥 입구에 들여보낸 우리는 과연 4월 한 달의 고민을 통해 5월 장미 대선에서는 강명한 대통령을 고를 수 있을까? 후보로 나선 이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지 악착(齷齪)같이 들여다보고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하긴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 것인지? 민주정(民主政)이라는 제도 자체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큰 숙제가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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