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률아! 기억나니? 우리 2008년 세계팀선수권에서 토브욘 브롬달의 스웨덴을 상대로 단 1점도 못 쳐서 같이 울었잖아. 다신 그런 경기 하지 말자고 이를 갈았잖아. 네가 추구하고자 했던 당구의 모습을 완성시켜 볼 테니 부디 편히 잠들어라.”
지난 2015년 2월25일. 바로 전날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캐롬연맹(UMB)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한국 당구 선수 사상 최초로 수상한 최성원(40ㆍ부산시체육회)의 기쁨은 비통의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급거 귀국해 추도사를 읽은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오열했다. 최성원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지난 13일 독일 피어젠에서 끝난 같은 대회에 김재근(45ㆍ인천당구연맹)과 팀으로 출전해 한국 당구 최초로 정상에 오르며 우승컵을 고인의 영전에 바쳤다.
최성원이 스무 살이던 1996년 고교생 (故) 김경률과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당구 선수가 되고 싶어 중학교 3학년 때인 16세에 큐를 잡은 김경률은 부산 ‘재야의 고수’ 최성원에게 당돌한 제안을 했다. “행님, 서울로 안 갈래예?” 망설이던 최성원을 뒤로 하고 김경률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 2003년 2월 당구선수로 등록했다. 일취월장한 김경률은 ‘SBS한국당구 최강전’ 3차대회 결승전에 올라가 TV에 나오면서 ‘전국구 스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준우승에 이어 SBS 왕중왕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고, 2005년 SBS 한국당구최강전 2차전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대한체육회장배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2위에 올랐고, 이듬해인 2006년에는 그리스 볼로스 3쿠션 당구 월드컵에서 공동 3위를 차지하며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2015년 불의의 사고로 서른 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는 한국 당구의 개척자로 통한다. 뭐든지 가장 먼저 나서 도전하고, 경험하며 선ㆍ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거나 시행착오를 알려줬다.
당구장이 불량 청소년 탈선의 공간이라는 인식은 오랜 기간 한국 당구에 대한 편견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을 지배해 왔다. 그래서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당구장 출입자체를 뜯어 말렸다. 1994년 청소년에게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경률 이전에 음지에 있던 한국 당구를 스포츠의 반열에 올려 놓은 인물은 고(故) 이상천(전 대한당구연맹 회장)이다. 서울대를 중퇴하고 1987년 미국으로 떠난 이상천은 1990년부터 2001년까지 12년 연속 전미당구선수권을 제패했고, 세계 3쿠션 월드컵에서 5차례(1991~94년, 99년) 정상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1999년 그에게 ‘당구계의 마이클 조던’이라는 찬사를 보내며 최고의 당구 선수로 소개했다. 단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해외파’로 활동하던 이상천의 활약상은 국내 당구팬들에겐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김경률의 등장은 그래서 특별했다. 김경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데뷔 3년 만인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돼 캐롬(3쿠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데뷔 4년 만에 세계 정상권의 대열에 올라섰다. 2010년 2월에는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3쿠션 월드컵에서 딕 야스퍼스(당시 세계랭킹 1위ㆍ네덜란드)를 3-2로 꺾고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 챔피언이 됐다. 천재로 불린 이 전 회장이 미 시민권자로 미국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며 강호들과 겨룬 반면 김경률은 순수하게 국내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던 의미 있는 우승이었다. 2011년 2월에는 세계랭킹 2위에 올라 세계 당구계를 놀라게 했다. 또 2000년대 이후 10여 년간 3쿠션 ‘세계 톱랭커 12인’에서 밀려나지 않은 유일한 비유럽권 선수였다.
박선영 서울당구연맹 사무국장은 “2008년 김경률과 조치연의 아담 유니버셜 40점 경기가 있었는데 조치연이 1점 남은 상황에서 경률이가 한 번에 18점을 치고 경기를 끝낸 걸 직접 봤다”고 말했다. 당시 김경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김용철 SBS스포츠ㆍ빌리어즈TV 당구 해설위원은 “뒤돌려치기와 빗겨치기는 지금 어떤 선수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백발백중이었다”고 떠올렸다. 이후에도 김경률의 전성기와 유명세는 계속됐다. 2014년 개국한 당구전문채널 빌리어즈TV에서는 당구레슨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입담도 과시했다.
그렇게 전도유망한 김경률을 가슴에 품은 동료들은 지금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김경률은 2015년 2월22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시설물을 수리하다가 실족해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다음 날이 그의 35번째 생일이라 더욱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김경률과 동갑내기 절친이었던 조재호(37ㆍ서울시청)는 “지금도 가끔 믿기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조재호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임태수 선수를 19세 때 서울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보고 ‘너랑 비슷하게 당구를 잘 치는 친구가 아래 지방에 있다’고 해서 경률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2003년 선수 등록 후 처음 만난 김경률의 첫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동갑으로 알고 있었는데 2월생이라면서 형 대우를 받으려고 하다가 나도 4월생이라고 하자 먼저 친구하자고 하더라고요.(하하)“
지난해 3월16일 서울 잠원동 J빌리어드클럽. 출전 선수들과 심판은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다른 대회와 달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멋진 샷이 나와도 환호성을 자제한 관중들의 박수 소리만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결승이 끝난 뒤에 추모식에서 생전 고인의 경기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이 나오자 아버지 김호남(67)씨와 아내 김윤정(38) 씨 등 유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 당구의 보석은 조재호, 강동궁 등 다른 선수가 하면 되고, 나는 머슴 역할을 하겠다"는 고인의 인터뷰가 나올 때는 박수향, 김민아(이상 대구연맹) 등 동료 여자 선수들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김경률의 1주기를 기리기 위해 ‘김경률 추모배 3쿠션 오픈 당구대회’를 열었던 동료들은 올해 2회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4월29일과 30일 서울, 인천, 일산에서 열린다. 이집트 룩소르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3쿠션 당구월드컵에 출전 중인 조재호는 추모위원장을 맡아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도 대회 준비를 진두 지휘했다. 조재호는 “(김)경률이는 한국 당구의 개척자였다"고 말했다. 자신을 비롯해 최성원, 강동궁(37ㆍ동양기계) 등 최근 한국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게 김경률이 뚫어 놓은 길 덕분이라는 것이다. 조재호는 “사실 이상천 전 회장님을 빼면 한국 당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면서 "그러다 김경률이 2000년대 초반부터 자비를 들여 월드컵 등에 나서면서 국제대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경률이 닦아 놓은 길에 한국 선수들의 쾌거가 이어졌다. 최성원이 2012년 터키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014년 한국인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세계 랭킹 1위, 2015년 세계캐롬당구연맹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었고, 얼마 전 팀 선수권 우승도 차지했다. 강동궁도 2013년 수원 월드컵과 2015년 LG U+ 마스터스를 제패했다.
조재호는 “2005~06년부터 경률이는 이미 톱랭커였고, 우리는 2008~09년부터 월드컵에 나갔다. 예전 선배들이 월드컵 나갔을 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런데 경률이는 최재동 선배한테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혼자서 월드컵을 나가더라”면서 “직접 다니고 경험해봐야 좋아지는 것들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해외 선수들을 보고 브롬달은 상어라는 둥 별명까지 붙여 가며 전력 분석까지 해줬다"면서 "그런 도움이 있었기에 국제대회 성적이 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국내용이란 오명을 벗고 지난해 12월 마침내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허정한(40ㆍ경남당구연맹)도 “나이는 동생이지만 내가 의지를 많이 했다. 개척자인 경률이 덕분에 숱하게 세계 무대에 도전했고, 우승까지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공을 돌렸다.
김용철 SBS스포츠ㆍ빌리어즈TV 해설위원은 “2003년까지 우리나라에 랭킹 제도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쟤는 잘 치는 애야, 못 치는 애야’ 정도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에 대한당구연맹 전무로 잠시 일하면서 세계연맹 랭킹포인트 계산법을 국내 도입했고, 1년 성적을 취합해 2005년부터는 랭킹 4위까지 월드컵에 보내주겠다고 선수들에게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는 경률이가 찾아 왔다. 지금 성적이면 4등 안에 무조건 들어 내년부터 월드컵에 나갈 수 있지만 경률이는 자비를 들여서라도 당장 나가겠다고 하더라”고 떠올렸다.
김경률은 혼자 잘 되려고 하지 않았다. 조재호는 “경률이가 가장 먼저 세계 톱랭커도 되고 유명한 선수도 됐지만 선ㆍ후배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면서 “무명 선수들에게 스폰서도 알아봐주고 일자리도 소개시켜주는 등 한 마디로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주의였다”고 말했다. 김용철 위원은 “그 당시만 해도 당구 선수가 당구로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경률이는 사업적인 수완도 뛰어나서 그 때 당구장 음료 서비스 유통을 했었다”고 말했다.
당구 저변 확대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박선영 연맹사무국장은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에서 당구 신이 필요하다고 해서 선수 섭외 요청이 왔었는데 김경률 선수에게 부탁을 해서 보내줬더니 나중에 경률이가 ‘장동건만 내가 먼저 사진을 찍자고 했고, 나머지 배우들은 모두 나에게 사진 촬영 요청을 하더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 있다. 그만큼 김경률은 당시 당구계에서 독보적인 인기 스타였다“면서 ”하지만 경률이는 아무리 바빠도 섭외 요청이 오면 꼭 ‘내가 출연하면 당구에 도움이 되는 거냐’고 꼭 연맹에 물어왔다“고 말했다.
조재호는 “경률이는 생전 '당구 선수들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면서 "또 우승을 한 뒤 기자들에게 꼭 태극기가 나오도록 찍어달라고 하는 등 한국 당구의 자부심이 컸다"고 말했다.
김경률의 죽음을 두고 말이 많았다. 김경률은 고질적인 눈떨림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2013년 뇌신경 수술을 받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경기인 만큼 결단을 내렸지만 한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최성원과 조재호, 강동궁 등 라이벌들이 김경률을 추월해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당시 시작한 당구 용품 사업도 신통치 않아 혹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실족사로 판명됐다. 박선영 사무국장은 “경률이는 가장 먼저 시작했을 뿐 늘 제 자리에 있었다. 다만 동료 선수들이 병역과 결혼 등 개인사를 해결하고 뒤늦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상대적으로 경률이의 부진으로 확대 해석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길고도 짧은 20년이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선수와 코치로 호흡을 맞춘 김정규 당구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은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바둑의 서봉수 같은 선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꿈과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판 결과 한국 당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김용철 위원은 “많은 선후배들이 경률이에 대한 좋은 추억들을 갖고 있는데 경기력이 좋아서뿐만 아니라 평소 행동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추모 열기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회 추모 대회에서 조재호의 추도사는 아직도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김경률은 다른 선수들을 보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은 머슴이 되겠다고 말했다. 언제나 솔선수범했고 그런 그가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에 많은 슬픔을 느끼지만 그가 있었기에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앞으로 그를 기억하며 행복해할 많은 시간들이 있기에 오늘은 슬픈 날이 아니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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