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그날 난 베이징특파원이었다. 타국에서 세월호가 점점 물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지켜보는 심정은 더욱 참담하고 먹먹했다. 아이들이 바로 눈 앞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신문과 방송은 연일 세월호 참사를 대서특필했다. 침몰한 국격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중국인 앞에서 ‘한국은 적어도 스모그와 먹거리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라고 강변했던 호기도 더 이상 부릴 수 없게 됐다.
2년 전 중국에서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당혹감은 더 커졌다. 2015년 6월1일 밤 454명을 태운 채 창장(양쯔강)을 거슬러 오르던 유람선 둥팡즈싱호가 후베이성 진저우시 유역에서 침몰했다는 소식이 처음 알려진 것은 다음날 새벽4시였다. 리커창 총리는 곧 바로 전용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갔다. 그는 당일 오전 베이징에서 1,200km나 떨어진 사고 현장에 도착, 구조 활동을 지휘했다. 보고 7시간이 지나서야 청와대와 1.2km 거리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나타나 엉뚱한 질문을 던진 우리 국가지도자와 대조됐다. 한국 대통령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는 중국 기자들의 ‘호기심’엔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중국이 사고 나흘 만에 둥팡즈싱호를 물 밖으로 가뿐하게 들어 올린 순간에도 세월호가 생각났다. 박근혜 정권이 사고 1년이 다 되도록 세월호 인양 결정을 미루던 때였다. 인양은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많이 늦었지만 사고 1,073일만에 세월호를 끌어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은 그래서 참 다행이다. 세월호 인양은 단순히 침몰한 배를 인양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국민 자존심을 건져 올린 것이다. 세월호는 그 동안 국민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어리였다. 세월호가 가라 앉아 있는 상황에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월호 인양은 반드시 해야 할 숙제를 뒤늦게 끝낸 셈이기도 하다. 국민들 마음속 그 덩어리를 치운 것이다. 세월호가 떠 오르며 미수습자 가족의 시계는 비로소 4월17일로 넘어갔다. 역사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에야 세월호가 떠오른 것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은 세월호 참사에서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광화문 촛불 집회에선 항상 세월호 희생자 추모 행렬이 길게 늘어졌다. 촛불이 세월호를 인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는 앞으로도 쉽게 아물긴 힘든 상처다. 그러나 세월호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과연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지에 대한 값진 교훈도 줬다. 사실 길게 보면 국민의 손으로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 것은 우리 5,000년 역사 중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제 고작 예닐곱 명을 뽑아 봤을 뿐이다. 그 동안 비싼 수업료를 냈다.
세월호가 곧 마지막 항해를 떠나 3년 간의 긴 여정을 마친다. 세월호가 당초 목적지인 제주까진 가지 못했지만 미수습자 9명 모두 가족 품에 안겨주길 염원한다. 그리고 새 희망이 되길 고대한다.
그래서 먼 훗날 다시 중국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은 세월호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가와 지도자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세월호를 인양했고, 이를 통해 국민적 상처를 치유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통령을 잘못 뽑을 때도 있었지만 국민을 저버린 지도자에게는 곧 바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냈다. 세월호는 끔찍한 절망이었지만 한국은 이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세월호와 함께 전 국민이 통합의 항구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박일근 경제부장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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