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성별 따져서 아이 낳는 부모가 있나요?”
임신 8주차에 접어든 예비 엄마 임가영(가명∙27)씨는 최근 ‘임신 32주 전 성별 고지 금지법’을 접하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임신 16주 즈음부터는 간접적으로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임씨는 “그런 법이 아직 남아있는 줄 몰랐다. 시대 착오적인 법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의료법 20조는 의료인이 임신 32주 이전에 부부에게 태아의 성별을 알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던 30년 전 여아 낙태를 막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은 처음엔 ‘고지 전면 불가’이었으나 2009년 ‘32주 이후 성 감별 가능’으로 개정됐다.
하지만 과거와 비교해 남아선호사상이 퇴색하면서 의료법 20조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이 크다. 1995년 출생아 성비는 여아 100명 대 남아 113.2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여아 100명 대 남아 105.3명으로 줄었다. 2015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낙태 경험 여성의 43.2%는 ‘원하지 않는 임신’ 때문에 아이를 지웠고 그 뒤로 산모의 건강문제, 경제적 사정, 태아의 건강문제, 주변의 시선 등이 잇따랐다.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는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의료법 20조가 의료인과 부모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단 지적도 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30년 전 도입된 법률이 의사의 직업수행의 자유, 부모의 알 권리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득녀한 이희성(가명∙33)씨는 괌으로 출산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병원에 문의해 태아의 성별을 알아냈다. 그는 “면세점에서 아기용품을 사기 위해 성별을 물어봤다”며 “가족이 될 아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상 임신 12주부터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지만 출산을 두 달 앞둔 32주부터 성별 고지가 가능하기에 의료인들도 난처한 상황이다. 법을 준수하느라 입을 다물면 성별을 알려주는 병원으로 옮기는 등 고객 이탈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의료인이 간접적으로 태아의 성별을 알리는 풍토가 자리잡았다. 남아의 경우 “다리 사이에 뭔가가 눈에 띈다”고 알려주거나 ‘여아’대신 ‘공주님’으로 태아를 지칭하는 등이다.
해외에서도 태아 성별 고지는 뜨거운 감자다. 임신 12주 전에는 낙태가 허용되는 스위스도 정부와 국가 기관이 이견을 보이고 있다. 스위스 국가윤리위원회는 12주 전에도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연방정부는 최근 임신 12주전 성별고지를 금지하는 법률 초안을 만드는 중이다. 윤리위는 “스위스에선 특정 성별에 대한 선호가 없으므로 산모에게는 태아의 성별을 알 권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중국, 인도 등은 태아 성별 감별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법제이사는 “태아 성감별이 허용되면 낙태가 늘 것이라는 주장은 성감별과 낙태의 연관성을 비약적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낙태금지에 대한 규정이 엄연히 있는 만큼 태아 성감별 금지법조항은 위헌인데다 실효성이 없으므로 폐지 또는 개정돼야 한다”며 “하지만 법이 개정되기 위해서는 부모, 의료계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시민단체 등의 의견 수렴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은혜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