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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불새의 깃털 하나

입력
2017.03.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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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왕자처럼 불새의 깃털 하나만 뽑는 것으로는 안 되나.

머릿속에 느닷없이 등장한 이반 왕자는 러시아의 옛이야기 속 인물이다. 황제인 아버지의 정원을 밤새 지키다가 마침내 황금 사과를 따 먹으러 오는 불새를 붙잡는다. 불새는 눈물을 흘리면서, 깃털 하나를 줄 테니 자기를 놓아달라고 애원한다. 왕자는 새가 가엾어서 놓아준다. 물론 깃털 하나를 뽑는 것은 잊지 않는다. 불새의 깃털은 단 하나만 있어도 수백 개의 촛불을 켠 듯 주위가 환해지는 신비한 것. 그 뒤 왕자는 아름다운 공주를 구하고, 괴물을 처치하고, 마왕과 싸우는 험난한 일들을 해내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는다. 그 때 왕자는 불새의 깃털을 던진다. 그러자 커다란 불꽃이 타오르듯 어둠 속에서 불새가 나타난다.

지나간 겨울, 토요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고민에 잠기곤 했다. 이불 속이 따뜻하고 아늑할수록, 창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황량할수록, 아침 뉴스에서 일러주는 오늘의 최저 기온이 낮아질수록, 내 마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민의 내용은 단순했다. 오후에 광화문에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전까지는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촛불집회에 머릿수 하나라도 보태야 한다는 의욕이 넘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삶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소추안이 가결되자 헌재로 탄핵 심판이 넘어갔고, 해가 바뀌었고, 겨울이 깊어갔다. 그 무렵 태극기를 흔들고 군가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더욱 끓어올라야 할 의욕과 믿음이 급격히 시들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토요일 아침마다 보고 싶은 영화와 읽고 싶은 책이 떠올랐고, 갑자기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야지 마음먹어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납득할 만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 사태를 외면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깨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더욱 갈팡질팡.

망설임 속에서 생각은 자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나와의 약속이고 뭐고, 아아, 나는 이 부담감과 초조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불새의 깃털을 하나만 뽑는 것으로는 안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나간 겨울의 어느 날, 광화문에 모인 백만 촛불의 장관이 백 만 개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새가 날개를 막 펼치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것.

광장에 나가는 기쁨이 시들해질수록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은 무거워져 가는 이 어긋남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해방구가 되어 버린 듯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를 행진하는 벅차오름. 단상에 올라가 마음속에만 숨겨두었던 말을 토해내는 자유로움. 그 모든 것이 시들해지면서 나는 투덜거리곤 했다. 촛불은 목표를 지정해주는 깃발이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공중에서 휘날리는 일치된 주장이나 선언도 아니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제도 아니고, 손가락을 자르며 헌신해야 할 애국애족의 길도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촛불은 차라리 흔들리는 빛이지 않나. 사람마다 의미가 달리 해석될 위험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단단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소망과 염원이라서, 눈물 흘릴 줄 아는 분노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촛불이 늘 있어야 마땅한 자리는 광장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이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추운 광장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저 모두들 불새의 반짝이는 깃털 하나씩 뽑아서 가슴에 품고 있었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순간이 오면 불새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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