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이필익이 귀양살이 기록한
‘북정록’ 원본 만해기념관서 발견
외부와 격리 등 힘든 형벌 아닌
다른 내용 묘사돼 학술적 가치
조선시대 유배생활은 가혹하기만 했던 것인가. 귀양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돼 가족과 소통조차 하기 힘든 형벌이었을까.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조선시대 개인 일기 학술조사연구’를 통해 경기 만해기념관에서 찾았다고 26일 밝힌 유배지 일기 ‘북정록’의 내용은 유배생활에 대한 고정관념과 거리가 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지인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유배자의 모습이 담겨있다.
‘북정록’은 지금의 논산 일대인 충청도 이산에 거주하던 선비 이필익(1636~1698)이 숙종 원년(1674) 유배지인 함경도 안변으로 떠날 때부터 3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친 뒤 숙종 5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록이 들어있다. ‘북정록’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북찬록’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김치후가 1731년 서문을 쓴 ‘북찬록’은 이필익의 원본을 그의 손자 대에 필사한 것으로 ‘북정록’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북정록’에는 이필익은 법령이 정한 유배형의 규정을 상당 부분 지키지 않으며 생활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유배자는 외부와 차단된 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내용이 ‘북청록’에 묘사돼 있어 학술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북정록’에는 이필익이 유배지에 도착하고 3개월이 지난 뒤인 1675년 2월 그의 처와 아들이 말 5필과 노비 6명을 이끌고 그를 찾아온 기록이 있다. 이필익은 가족들과의 귀양지 동거를 금지한 법령에 반하여 집을 짓고 노비를 거느린 채 식솔과 함께 지냈다.
당시 안변부사는 이필익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이필익이 안변에 도착한 다음달부터 술과 기름, 달력, 콩, 반찬, 약물을 제공하고 조정 소식까지 전했다. 안변부사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지급하기도 했고, 이필익은 이 땅에서 노비를 포함한 9명이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농작물을 수확했다. 외부의 경제적 지원도 있었다. 이필익은 각 군현의 수령과 서원, 향교, 유림 등으로부터 식재료와 생활용품을 받았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서원과 향교에서는 지필묵을 보냈고, 전라감사와 덕원부사, 함흥판관은 곡물과 어물, 옷감을 선물했다.
이필익의 남다른 유배생활은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인인 이필익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쥐락펴락했던 송시열(1607~1689) 문하에서 수학했다. 1674년 우의정 송시열을 공격한 남인 곽래건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문 맨 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같은 해 송시열은 파직됐고, 이필익은 귀양 길에 올랐다. 이필익이 서인을 대표해 처벌 받은 것으로 인식돼 서인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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