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71) 감독이 러시아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에 출전했을 때다. 러시아는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스페인에 1-4로 참패했다. 손 한 번 못 써보고 무기력하게 무너진 러시아는 충격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회복이 힘들 거라 봤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패배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도망치느냐 아니면 계속 싸우느냐다”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러시아는 며칠 뒤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2ㆍ3차전에서 그리스와 스웨덴을 연파해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뒤 8강에서 네덜란드마저 격파하고 4강에 올라 ‘히딩크 매직’을 완성했다. 외신들은 열패감에 휩싸인 선수들의 마음을 불과 며칠 만에 바꿔놓은 히딩크 감독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위기 극복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다.
한국은 23일 중국 창샤에서 마르첼로 리피(69) 감독이 이끄는 중국에 0-1로 무릎 꿇었다. 중국 축구가 엄청난 투자를 앞세워 무섭게 발전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양국 관계가 냉랭한 상황에서 시원한 승리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경기 뒤 기자회견에서 리피 감독은 중국 취재진의 기립 박수를 받은 반면 슈틸리케 감독은 “팬들에게 죄송하다”며 완패를 인정했다.
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잡음, 적장에게 뻔히 읽힌 전술 변화, 마지막 교체 카드로 A매치(국가대항전) 경험이 아예 없는 선수를 투입한 무모함 등등. 하지만 실수를 분석하고 따지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한국은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시리아와 최종예선 7차전을 치른다.
한국은 현재 3승1무2패(승점 10)로 이란(4승2무ㆍ승점 14)에 이어 2위다. 1위는 힘들어졌지만 2위까지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이 주어져, 절망할 단계는 아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금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깨가 축 쳐진 선수들을 빨리 일으켜 세우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다.
박지성(36ㆍ은퇴)은 자서전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일 때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우승을 위한 중요한 경기에서 패한 날, 침울한 선수단 버스로 맥주가 한 박스 들어오자 웨인 루니(32)가 천연덕스럽게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분위기를 띄우더라는 것.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박지성은 ‘패배를 곱씹을 게 아니라 빨리 씻어내는 것도 강 팀의 한 조건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썼다.
7년 전 ‘공한증’이 처음 깨지던 날 한국대표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10년 2월, 한국은 도쿄 동아시아선수권에서 중국에 충격적인 0-3 완패를 당했다. 1978년 이후 32년간 이어져 온 27경기(16승11무) 무패 기록이 깨지자 팬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사령탑이던 허정무(62)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다음날 훈련을 전격 취소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호통 대신 선수들에게 손수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모두 잊자”고 했다. 사흘 뒤 한국은 숙적 일본을 그들의 안방에서 3-1로 제압하며 후유증을 최소화했다.
겸연쩍게도 슈틸리케 감독은 24일 한국 축구대표팀 역대 사령탑 최장수 재임 기록을 새로 썼다. 2014년 9월24일 공식 임기를 시작한 그는 재임 기간 2년182일로 기존 기록 보유자 허정무 부총재(2년181일)를 넘어섰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시리아전에서 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면 이 신기록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만약 시리아전도 패하면 감독 교체라는 초강수가 불가피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 시간, 대표팀에게 어떤 주문을 걸고 있을까.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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