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른 뒤 교사 현관 쪽 화단 창가로 다가가는 아이가 있었던 것도 같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한낮이었을까. 오그라든 그림자, 머리를 뜨겁게 겨냥하던 해의 눈부심이 기억에 남아 있다. 잠기지 않은 창문을 찾아내 빈 교실로 넘어 들어갔던 아이. 그 아이는 거기서 무엇을 했던가. 아랫배를 찌르면서 몸을 조여오던 죄의식 한편으로 입안을 채워오던 그 이상한 단내. 내 비밀의 지하실에 봉인된 채 남아 있는 ‘죄(sin)’의 이야기들. 도무지 발설하지 못하겠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므네모시네, 기억의 여신에게 망각과 삭제의 권능을 발휘하도록 요청한 목록도 적지 않으리라. 딱히 구체적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음습한 이야기들은 또 어찌하나.
그런데 많은 문학 작품들이 알려주듯이 살면서 얼마간 이런 비밀의 영토를 품지 않는 사람들은 없는 듯하며 그 점은 이상한 방식으로나마 우리를 위로한다. 각박한 세상에 관용의 지대가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도 이로써 조금 확보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최근 읽은 한 편의 매혹적인 소설은 그 비밀이 인간 종의 한계나 결함이기는 해도 때에 따라서는 유한하고 보잘것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을 위엄으로 감싸고 고양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준다.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바다’(정영목 옮김, 문학동네)라는 소설인데, 2005년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다. 거의 단 한 문장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감각과 사유의 깊이가 작가의 ‘스타일(문체)’로 정교하게 결정(結晶)되어 있다. 옮긴이의 그만한 수고 덕분이겠지만, 번역된 한국어로도 그 점을 느끼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면서 그 문장 낱낱과 문장들의 흐름이 쓰라린 상실을 안고 어린 시절의 바닷가(여기에 또 한번의 상실과 비밀이 묻혀 있다)로 돌아온 화자의 현재, 그 불수의적인 회상의 리듬과 맞물리면서 그 자체로 서사가 되고 메시지가 되고, 궁극에는 삶이라고 하는 말하기 힘든 그 무언가에 대한 은유가 된다.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라는 정의는 일종의 클리셰 같기도 한데 ‘바다’의 경우는 오히려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다.
일견 이 소설에서 ‘비밀’은 반전이라는 형식으로 소설의 결말에서 쿵쿵 독자를 강타한다. 그러나 비밀이 그렇게 ‘반전’의 자리에 올 수밖에 없는 것은 정확히 주인공 화자가 그로부터 달아나야 했던 50년의 시간 때문이며, 그런 한에서 비밀은 주인공의 혼돈과 방황 안에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 역시 뒤늦게 함께 확인하는 절차라고 해야 한다. 물론 이 소설의 가장 큰 비밀은 가난한 하층계급의 아이로 자라난 주인공이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상상하고 변환시키려다 끝내 실패한 과정이며, 그 자신에 대한 ‘앎’에조차 이르지 못하게 한 인생이라는 바다의 그 무심한 표정일 것이다. 밴빌이 부리는 언어의 마법도 이 지점에선 무력감을 자인하는 듯하며 끝내 항변과 질문의 너울로만 일렁인다. 그러거나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V양의 비밀은 우리가 타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 품은 채 이 세상의 바닷가를 떠나게 될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보던 것은 결코 나에게 보여주려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보려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시선이 엇갈리던 바닷가 실낙원의 이야기를 끝맺는 이 비밀의 종지부는 사실의 교정 이상의 권위로 소설을 닫는다. 마지막 말의 권위. 이때 언제나 우리의 것인 무지와 맹목은 이상하게 사랑스럽고 느껍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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