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이 만든 비매품
출판사 대표ㆍ편집장 등 4명
“유럽 서점 둘러보자” 떠나
여행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
*‘서점 기행’ 여행 상품되나
답사 주선했던 여행사에선
4개국 10~12일 일정 준비
“지루할 것 같다고요? 전혀”
출판계에서 잔잔하게 화제가 되고 있으나,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 책이 하나 있다. ‘우연히, 서점’이다. 시를 아끼는 정은숙(마음산책), 과학에 관심 있는 김인호(바다출판사), 장르문학을 파고드는 김홍민(북스피어) 대표에 인문ㆍ역사를 좋아하는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까지. 이들 4명이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11일간 독일ㆍ영국ㆍ네덜란드 등 유럽 유명 서점을 둘러보고 온 기록이다.
지금 국내에도 책방 유행이 불고 있다. 갖가지 개성과 멋을 지닌 동네책방 유행에 ‘책맥’(책+맥주) 바람까지 더해졌다. 일본의 자그마한 서점 이야기 ‘아주 오래된 서점’(문학동네), 서평가 금정연ㆍ소설가 김중혁이 우리 서점을 돌아다닌 ‘탐방서점’(프로파간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세계 유명 서점을 다 돌아보고 낸 ‘세계서점기행’(한길사) 등 서점을 다룬 책들도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서점’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을 아무리 뒤져봐야 찾을 수 없다. 비매품으로 딱 10부만 한정 제작했으니 그렇다.
사연은 이렇다. 올 초 도서 도매상 송인서적 부도 사태가 터졌다. 함께 놀려가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놀러 못 갈 바에야 서점을 둘러보자고 결의했다. 여기에 여행사 유로스테이션(ttdt.kr)의 김신 대표가 가세했다. 김 대표는 국내 여행사에게 유럽 여행상품을 공급하는, 말하자면 여행업계의 도매상이다. 웬만한 여행사보다 유럽 여행 프로그램을 더 잘 알고 있는 전문가로 미술관, 뮤지컬 공연 등을 주제로 한 ‘아트 투어’ 상품을 간간히 개발해왔다. 그러던 중 ‘서점 기행’도 하나의 아이템이 될 수 있다 생각했다. 올 가을 20~30명 수준으로 시작하기로 계획하고 사전 답사 차원에서 이번 여행을 진행했다.
이들이 둘러 본 곳은 독일 마이어셰 도르스트 서점, 네덜란드 셀렉시즈 도미니카넌 서점, 벨기에의 트로피슴 서점, 영국의 포일스 서점, 워터스톤스 서점, 셜록홈즈 박물관, 알레프 서점, 돈트북스 등이다. 서점만 다닐 수 없으니 중간에 케테 콜비츠 미술관,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사치갤러리, 옥스포드대 자연사 박물관 등도 집어넣었다.
이 여정이 책으로까지 묶인 건 눈 뜨고 있는 시간의 90%를 원고 들여다보는 데 쓴다는 이은혜 편집장의 ‘괴력’ 덕이다. 여행 막바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김인호 대표가 농 삼아 “난 치매라 여행을 잘 기억 못하니 누가 한번 정리해보라”는 말을 던졌다. ‘우연히, 서점’은 이 편집장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지 이틀 만에 만들어졌다.
김홍민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서점으로 네덜란드의 셀렉시즈 도미니카넌 서점을 꼽았다. 13세기 교회를 서점으로 개조한 이 곳은 ‘못 하나 박아도 안 된다’는 허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가 등 인테리어를 독창적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김홍민 대표는 “오래된 공간을 어떻게 재활용할 수 있느냐를 보여준 가장 좋은 예”라고 말했다. 정은숙 대표는 아일랜드의 율리시스 서점을 꼽았다. 정 대표는 “우리로 치자면 일종의 희귀본만 파는 곳인데 우리와 달리 마음대로 책을 펴볼 수 있도록 해둬서 오래 묵힌 세월의 향을 원 없이 맡고 왔다”고 말했다.
사업이란 변수가 많은 법. 정말 ‘유럽 서점 기행’이 여행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단체여행, 배낭여행, 자유여행 등을 지나 이제는 정말 나만의 특색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게 김신 대표의 판단이다. 이번 답사가 독일, 네덜란드, 영국 중심이었다면, 정식 상품으로 내놓을 땐 프랑스까지 일정에 포함시켜 10~12일 일정을 준비 중이다. 서점을 중심으로 삼되 미술관, 박물관도 곁들인다. 출판계 이벤트의 귀재인 김홍민 대표도 적극적이다. 그는 “우리가 내는 책의 저자, 혹은 소설의 배경 같은 걸로 연결 지을 수 있다면 20~30명 규모로 할 수 있는 아주 재미난 이벤트가 될 것 같아 적극 추진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 이외엔 조금 지루한 여행이지 않을까. “아니에요. 저도 출판사 일 하면서 해외 서점 좀 돌아다녀본 편인데, 이렇게 멋지고 예쁜 서점만 골라서 다녀본 건 처음이에요. 책을 읽어서, 이해해서가 아니라 책이 가진 물성이나 디스플레이, 분위기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어요.” 정은숙 대표의 주장이다.
여행의 파장은 이미 시작됐다. “그냥 우리끼리 사적으로 놀러 갔다 온 얘기인데….” 머리를 긁적이던 김인호 대표였건만 정작 귀국 뒤엔 출판사 직원들에겐 “앞으로 ‘박’(책을 만든 뒤 표지 글자에 색이나 문양을 다시 입히는 후가공 기법)을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오랜 서점에서 발견한 다양한 디자인에 넋을 잃어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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