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황홀함을 선사하는 군락만 봄 꽃일까. 산수유가 아니라도 구례 땅 곳곳은 따사로운 봄 기운으로 충만하다. 성삼재-노고단-반야봉으로 이어지는 1,000m 이상 지리산 고봉이 치마폭처럼 섬진강으로 흘러내리는 끝자락에 자리잡은 절간과 고택에도 봄이 흩뿌려져 있다.
천 년의 봄, 화엄사와 천은사
먼저 천년고찰 화엄사. 백제 성왕 때인 6세기 중엽(544년)에 창건했으니 실제로는 1,000년도 넘은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는 참화를 겪어 석조물을 제외하면 현재 남은 전각은 모두 그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 지나 대웅전까지 이르는 길은 일직선상에 있지만 살짝 휘어 걷도록 멋을 부렸다. 조화롭게 배치한 가람, 국내에서 가장 큰 석등,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각황전 등 국보로 지정한 문화재도 볼거리지만, 이맘때 화엄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홍매화다.
각황전 오른쪽 귀퉁이에서 겨우내 처연히 늘어져 있던 가지마다 연지곤지 찍은 듯 붉은 망울을 터트린다. 일장춘몽처럼 사찰의 위엄을 일순간에 흩트려 놓는다. 조선 숙종(1674~1720년 재위)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심은 나무라니 수령은 300년 가량된다. 장륙전이 있던 자리에 심어 장륙화(丈六花)라고도 하고, 꽃송이가 붉다 못해 검은 빛은 띤다 하여 흑매화로도 부른다. 그 화려한 자태에 반해 사진 좀 찍는다 하는 ‘진사님’들이 전국에서 카메라를 들고 몰려든다. 개화는 다른 곳보다 다소 늦어 4월초 절정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강문 앞 당단풍, 만월당 앞 흰매화도 진한 향기를 풍겨 지금 화엄사(華嚴寺)는 꽃 화(花)자 화엄사다.
화엄사까지 가서 놓치면 아쉬운 것 중 하나가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이다. 대웅전 뒤편이니 많이 걷지 않아도 된다. 오솔길을 이룬 대숲을 통과하면 절 마당 앞에 석탑이 하나 섰는데, 암자의 이름처럼 9층은 아니다. 가람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마름모꼴로 비껴서 자리잡은 모습이 특이하다. 모과나무 기둥은 절간 뒤편을 장식하고 있다. 대패질을 하지 않고 매끈하게 뒤틀린 모과나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2개의 기둥이 처마를 떠받치고 있다. 밑동의 옹이도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댓돌 생김새대로 깎아 맞춘 기둥이 살아있는 나무처럼 보인다.
소담스런 흙 길과 널찍한 돌계단을 오르던 화엄사의 옛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일주문부터 바닥에 깔아 놓은 대형 석재는 다소 의아하다. 돈 들인 만큼 웅장해진 반면 고찰이 품은 내공과 기품은 반감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고즈넉함에서는 화엄사의 말사(末寺)인 광의면 천은사가 오히려 낫다. 조선 4대 명필 이광사(1705~1777)가 썼다는 일주문의 서체부터 예스럽다. 한자를 모르더라도 일부러 물 흐르듯 썼다는 얘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은사는 경내에 이슬처럼 맑은 샘이 있어 애초 감로사(甘露寺)라 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중건할 때 샘 주위의 구렁이를 죽였더니 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하여 ‘숨은 샘’, 천은사(泉隱寺)로 이름을 바꾼 내력을 안고 있다. 개칭 후에는 화재도 자주 일어났는데, 일주문에 이 글을 내건 후에는 불이 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현판이다.
사찰로 들어가는 계곡에는 수홍루(垂虹樓)라는 누각이 올라앉은 다리가 놓여있다. 무지개가 드리웠다는 뜻의 누각은 올라갈 수 없지만,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는 물빛이 선경이다. 물결 한 점 없는 저수지에 투영된 수목과 하늘에 빠져있노라면 마음마저 잔잔해 진다. 천은사에서는 사찰 뒤편을 한 바퀴 돌아오는 탐방로를 꼭 걸어봐야 한다. 특히 아침나절 야생 차와 매화가 어우러진 언덕으로 햇살이 부서지면 이곳이 극락인가 싶을 정도로 황홀하다. 계곡을 지나 내려오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다. 걷는 내내 계곡 물소리가 청량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약 1km, 20분 정도 잡으면 된다.
금환낙지 명당 마을에 쌍산재, 운조루, 곡전재
지리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넉넉한 들판이 펼쳐지는 구례의 마을과 고택에도 봄빛이 따사롭다. 마산면 쌍산재(雙山齋)는 약 200년 된 오씨 고택이다. 10채의 건물 중 6채를 민박으로 운영 중이다. 한옥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고 고택체험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0여 년 전부터 시작했으니 가장 오래된 고택체험 집 중 하나다. 그런 만큼 주인장이 정성 들여 가꾼 흔적이 집안 곳곳에 묻어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건너채와 관리동이 자리잡고 있다. 마당 가득 지리산 깃대종인 히어리와 천리향의 향기가 은은하고, 바위취와 제비꽃도 앙증맞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개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대부분은 이곳만 휙 둘러보고 나간다.
고택은 대개 건물자체가 자랑거리인데 비해 쌍산재는 채우지 않은 공간이 더 빛난다. 별채 옆 대나무와 차나무가 빼곡한 오솔길 계단을 오르면 딴 세상이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푸른 대숲 사이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고, 오른편 돌담 주변에는 산수유와 매화가 흐드러졌다. 공부방이자 서재로 이용한 쌍산재 앞에는 뒤늦게 동백이 반발하고, 푸르름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벽문(映碧門)을 열면 정말 작고 푸른 저수지가 나타난다. 이 집에서 나고 자라 가꾸고 있는 오경영씨는 단체모임보다는 가족단위의 손님들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쉬어가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화재 위험 때문에 커피포트 외에 취사는 금지하고 있다.
쌍산재 앞 당몰샘의 물도 꼭 마셔봐야 한다. 감로영천(甘露靈泉)이라는 수식처럼 물맛이 정말 달다.
토지면의 운조루는 조선후기 양반집의 가옥구조를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T자형 누마루와 사람 인(人)자형 맞배지붕 구조의 사랑채, 부엌으로 사랑채와 연결된 ㅁ자형 안채, 담장을 대신하는 19칸 긴 행랑채 등은 건축학도들에게 더 주목 받는다. 운조루가 자리한 오미마을은 풍수지리학상 금환낙지(金環落地)로 알려져 있다.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명당이라는 말이다. 높은 산과 너른 들을 품은 아늑한 터에, 대문 앞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연못까지 갖췄으니 ‘구름 속에 숨어사는 새’라는 멋진 이름이 더욱 그럴 듯하다.
운조루 바로 앞 곡전재도 명당을 바라고 지은 고택이다. 연못과 대숲 산책길을 갖춘 집안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 성처럼 둥그렇게 외부를 두른 돌담과 대나무 울타리가 특이하다.
[구례여행 코스 짜기]
●18회를 맞은 구례산수유꽃축제가 이번 주말까지 열리고 있다. 축제는 26일 끝나지만 꽃은 4월 초순까지 볼 수 있다. 산수유꽃 축제에 이어 문척면 섬진강 일대에서는 다음달 1~2일 벚꽃축제가 예정돼 있다. ●구례의 여행지는 이동거리가 짧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구례읍에서 북쪽 끝 산동면, 남쪽 끝 토지면까지 차로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산수유축제를 보러 간다면 지리산온천지구-천은사-화엄사-쌍산재-운조루ㆍ곡전재 순으로 이동하면 편리하다. 천은사에서 운조루까지 전체 이동거리를 합해도 15km 내외다. ●천은사 가는 길은 지리산 성삼재를 거쳐 남원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로다. 구례에서 성삼재로 가려면 도로변에 설치한 천은사 매표소를 꼭 거쳐야 하는데, 절 구경이 목적이 아닌 여행객은 당황스럽다. 도로 자체가 천은사 땅을 지나기 때문이라는데 꼼짝없이 통행료(명목상은 공원문화유산지구 입장료)로 1,600원을 낼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이다.
구례=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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