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국이 2002년 한ㆍ일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지 못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국민 영웅’ 거스 히딩크(71ㆍ네덜란드) 감독은 ‘역적’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이점도 많지만 그만큼 부담도 크다. 특히 사령탑이 받는 압박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오는 5월 개막하는 2017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조 추첨식이 15일 열리며 서서히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하면 2002년 4강 신화를 떠올리지만 2007년에도 FIFA 주관 월드컵이 한국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 U-17(17세 이하) 월드컵이었다.
한국은 조 편성부터 무난했다. 페루, 코스타리카, 토고와 A조에 속했다. 대한축구협회는 2년 간 U-17 대표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경훈(56) 성남FC 감독이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그는 대회 전 “4강은 물론 우승까지 노려보겠다”고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승 2패. 조 3위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한 한국은 개최국에서 구경꾼 신세로 전락했다. 대회 흥행도 직격탄을 맞았다. 비난의 화살은 박경훈 감독에게 쏟아졌다.
16일 전화 인터뷰에서 10년 전 일을 묻자 그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말문을 뗐다. 그는 이어 “그 대회가 끝나고 축구를 포기했었다”고 돌이켜 봤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잠만 잘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다. “감독으로서 재기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그는 지인들의 권유에 전주대 축구학과 교수로 변신했다.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또 다른 축구 인생을 살 계획이었다.
막상 축구판을 떠나니 더 많은 게 보였다고 한다.
“그 전에는 모든 상대가 경쟁자로 보였어요. 상대가 잘 되기보다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많았죠. 하지만 내려놓으니 포용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축구를 더 사랑하고 알게 됐어요.”
그는 그라운드를 떠나서야 왜 자신이 U-17 월드컵에서 패배했는지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리지 못하고 나에게 맞추려고만 했어요. 정신력과 육체적으로 강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했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 거지요.”
박 감독은 2009년 10월 프로축구 제주 유나이티드 사령탑으로 부임해 만년 중하위권이던 팀을 2010년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U-17 월드컵 실패가 밑바탕이 됐다.
“그 때 좌절한 뒤 얻은 게 참 많아요. 예를 들어 홍명보 감독(2014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후 사임)도 월드컵에서 실패했지만 더 많은 걸 깨달았을 거라 봐요. 나를 통해 한 번 실패하더라도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해요.”
U-17 월드컵에서 타격을 입은 사람은 박 감독뿐이 아니었다. 당시 부경고의 스타였던 주전 미드필더 윤빛가람(27ㆍ옌볜 푸더)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대회 직전 인터뷰에서의 “K리그는 느려서 안 본다”며 별 뜻 없이 한 말이 기사화되면서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박 감독은 “윤빛가람이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어린 나이에 심적으로 많이 흔들렸다”고 아쉬워했다.
신태용(46)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 최고 스타인 이승우(19ㆍ바르셀로나 후베닐A)도 자유분방한 언행과 튀는 행동으로 종종 논란이 된다. 2007년의 윤빛가람과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박 감독은 “승우는 굉장히 자신의 색깔이 강하다. 하지만 외부 반응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신뢰를 드러냈다.
박 감독이 10년 전 느꼈던 엄청난 부담은 U-20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는 신태용 감독의 몫이 됐다. 박 감독은 “신 감독은 압박을 떨쳐내고 전술적 능력과 리더십을 100%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고 후배에게 덕담을 건넸다.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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