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로 홧김에 지르고
SNS 전시 통해 공감 얻어
※이번 ‘겨를’이 다룬 주제인 ‘X발비용’은 욕설이 섞인 비속어로, 기사에 쓰기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현재 젊은층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데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부득이하게 싣게 됐습니다. 독자들의 양해 바랍니다.
종일 회사에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원치 않는 저녁 모임까지 참석해야 했던 2월의 어느 날 직장인 최유정(가명ㆍ28)씨는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홀린 듯 속옷가게에 들어갔다. 평소 실용성에 중점을 둬 장식이 없고 겉옷에 비치지 않는 ‘단정한’ 속옷만 입던 최씨는 이날 따라 야한 속옷에 꽂혔다. “예전에 화려한 속옷을 입으면 기분전환이 된다는 친구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최씨는 레이스와 큐빅이 박힌 화려한 디자인의 속옷 세트를 8만원을 주고 충동구매 했다. 최씨는 “사실 지금은 그 속옷을 서랍 속에 처박아 뒀지만 그날만큼은 구매 행위 자체가 굉장한 만족감을 줬다”고 회상했다.
최근 'X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젊은층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비속어 ‘X발’과 ‘비용’이 합쳐진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홧김에 충동적으로 쓴 돈이란 뜻에서 ‘홧김비용’이나 ‘울화비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아 충동적으로 시킨 치킨 배달,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텐데 모범택시를 탄 경우 등이 그 예다. 말이 저속해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익숙한 돈이다. 이 단어는 지난해 11월 트위터 이용자 ‘오월암’이 처음 언급한 후 2만명 이상이 리트윗하면서 퍼져나갔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달 회원 9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스트레스로 홧김에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지출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80%에 달했다. 스트레스 비용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불필요한 물건 구매(25%)’ ‘온라인 충동구매(24%)’ ‘치킨 시키기(19%)’ 등이었다. 이들이 1년간 쓴 스트레스 비용은 평균 23만5,000원이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홧김에 돈을 쓰면 예전에는 도덕적 지탄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층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소비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시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다시 한번 위로를 받는다. 지난 10일 기준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이 해시태그(#)를 달고 X발비용으로 게시한 사진은 총 1,923건이었다. 이 중 최신 200건을 분석한 결과, 초콜릿과 케이크 등 디저트가 31건으로 가장 많은 품목을 차지했다. 술과 비싼 안주(30건)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쉽게 말해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얘기다. 달콤한 디저트와 쓰디쓴 술에 의지해 고통을 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상위권을 차지한 품목인 커피와 치킨ㆍ피자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립스틱ㆍ향수 등 화장품을 사거나 옷과 신발을 통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시도도 줄을 이었다. 미용실과 네일숍에 가는 경우도 상당한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용관리를 받으면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만족감을 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X발비용은 주로 ‘혼자서’ 쓰는 경향을 보인다. 소비 자체가 누군가와 함께할 필요가 없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파편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혼자 간편하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게 대표적이다. 스스로를 ‘맥알못’(맥주를 잘 알지 못하는)이라 말하는 직장인 정모(31)씨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집에서 혼술을 즐긴다. 고급 수입맥주에도 과감히 지갑을 연다. 정씨는 “맥주 종류를 잘 몰라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야근이 잦은 임모(31)씨는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심야영화를 보러 간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후회하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임씨는 “내 근무와 상관없는 2시간짜리 경험을 단돈 1만원에 할 수 있다”며 만족한다. “영화를 다 보고 집에 가서 남들이 써 놓은 리뷰를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청년들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일상생활 중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또는 ‘많이’ 느끼는 비율인 스트레스 인지율이 전체 국민 가운데 20ㆍ30대에게 가장 높게 나타났다. 20대는 36.9%, 30대는 38.7%가 일상 스트레스를 호소한 반면 40대와 50대는 각각 28.9%, 26.4%로 그보다 낮았다. 전례없는 취업난과 주거난 등 경제적으로 젊은층을 옥죄는 스트레스 요인은 다양하다. 높아진 인권 감수성도 한 몫 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30세대는 4050세대보다 노동권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 등에서 더 인권 친화적이다. 어렵게 취업문을 통과했는데 직장에서는 권위적인 조직문화와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에 취약해졌다는 뜻이다.
최악의 취업난과 과도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 등 사회적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란 진단도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X발비용’은 일자리와 노동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자 개인들이 이를 자체적으로 푸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며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소비는 절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 사회는 하루 8시간 근무 보장과 복지제도 확대 등 다양한 대책을 갖고 있지만 이를 실행할 의지와 사회적 합의는 아직 부족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젊은층도 X발비용이 단기간에 스트레스를 진정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돈을 쓰는 당시에는 일시적 만족감을 가져다 주지만 날아드는 청구서엔 자신의 ‘일탈’을 후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재희 기자 luden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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