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네 자는 실을 필요가 없다. 가경(嘉慶) 병진년(1796) 겨울에 내가 규장각 교서로 있었는데, 임금께서 몰래 명하시기를 ‘운서는 책을 펴서 문득 상서롭지 않으면 모름지기 밀어내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이 네 자는 수록할 필요가 없다. 신 용(臣鏞).”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796년 정조가 내린 운자 사전 ‘어정규장전운’에 빼야 할 내용을 붉은 먹을 이용해 책 위쪽 여백에 썼다. 이 문장 마지막에 쓰인 ‘신 용’은 정약용이 임금의 지시를 받아 교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자다. ‘어정규장전운’은 시를 지을 때 필요한 운자를 정리한 사전이다. 정조의 명령으로 이덕무(1741~1793)가 편집한 것이다. 다산의 첨삭 지침을 엿볼 수 있는 ‘어정규장전운’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가 기탁한 자료 가운데 ‘어정규장전운’을 포함한 고서 28책과 시문ㆍ서화ㆍ문서 12점을 경기 성남시 연구원내 장서각에서 20일부터 전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1936년 정인보와 안재홍이 간행한 ‘여유당전서’의 초고 격인 ‘경세유표’, 다산이 ‘맹자’ 내용 일부를 실용적 입장에서 재해석한 ‘맹자요의’ 등 고서도 함께 공개된다. 다산 친필과 직접 그린 산수화 등도 전시된다. 다산은 1814년 제자를 위해 우화 형식을 빌린 글 ‘현진사설’을 직접 썼고, 수기치인(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림)을 이루고자 했던 다산의 처세관이 담긴 ‘산재냉화’도 눈길을 끈다.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1793~1865)의 소장인이 찍혀있는 수묵산수도 위쪽에는 다산이 쓴 칠언절구 시가 적혀 있다. 이 그림과 크기와 필치가 같고 다산의 칠언절구 제시가 딸린 그림 3점이 전해져 오는데 이에 비춰 이 산수도 역시 다산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남양주 수종사에 놀러 갔다가 지은 시들을 모은 ‘유수종사시권’, 정약용이 쓴 시 초고들을 엮은 ‘다산유운’도 전시에 나온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김영호 석좌교수가 2015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189점(저술 166책, 시문ㆍ서화ㆍ고문서 등 23점) 중 일부다. 김 석좌교수는 연세대 실학연구교수로 일하던 1970년대부터 다산을 연구하며 사비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전시에 앞서 17일부터 이틀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국내외 학자들이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한 성과를 발표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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