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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영웅이 만든 난세

입력
2017.03.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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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3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 몫의 지명직 부총재를 마다하고 경선에 출마해 최병렬 부총재에 이어 2위로 당선된다. 이후엔 이회창 총재에 맞서며 정당 개혁을 외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 5월 3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 몫의 지명직 부총재를 마다하고 경선에 출마해 최병렬 부총재에 이어 2위로 당선된다. 이후엔 이회창 총재에 맞서며 정당 개혁을 외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는 한때 보수의 영웅이었다. 결과적으로 거짓 신화가 돼버렸지만, 그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 경선에 출마한 그의 첫 대중 연설 때다. 지금은 중진이 된 범 여권 의원이 일부러 현장을 찾았다. 그의 ‘말’이 궁금해서였다. 기대가 무색하게, 미리 적어온 쪽지를 꺼내 또박또박 읽는 박근혜의 모습은 꼭 초등학생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중진 의원이 놀란 건 다른 대목에서였다. “그런 박근혜에게 좌중이 조용하게 집중하며 끝까지 듣고 있더라. 그게 박근혜란 사람의 힘이었지.”

김무성 의원이,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던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었다. 남경필 경기지사 역시 ‘박근혜라면 가능할 것’이란 믿음 때문에 ‘천막당사’를 치고 그를 당의 새 리더로 만들었다.

그랬던 박근혜가 지금 보수에게는 가장 큰 짐이 됐다. 김 의원은 대선 출마의 뜻을 일찌감치 접어야 했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유 의원과 남 지사는 둘이 합쳐 5%도 넘지 못하는 ‘콘크리트 지지율’에 갇혀 있다.

보수가 짊어진 박근혜란 굴레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듯하다. 그가 끝없는 극한 분열을 자극하고 있어서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이후가 더 걱정되는 이유다. 대통령의 대리인단과 자유한국당 친박 의원들이 쏟아내는 발언을 보자. “국회의 탄핵소추는 목적, 절차, 방법이 세계 유례없는 사기다.”(김평우 변호사), “탄핵은 야당과 좌파 세력이 힘을 합쳐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을 찬탈하려는 책동이다.”(윤상현 의원) 한국당 내에선 공공연하게 헌재의 탄핵 심판 결정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말도 나온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대로 태극기 집회의 동력과 논리가 되고 있다. 그 뒤에 박 대통령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건 박 대통령이 지금도 정치를 놓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태극기 부대’에 ‘샤이 박근혜’까지 합쳐봐야 20%이며, 나머지 80%는 탄핵을 바라는 진짜 민심이라는 주장이 있고, 아마도 맞는 말일 테다. 그러나 그 80이 나머지 20과 절대 화해 불가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그런 점에서 최근 상가에서 만난 김무성 의원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여야의 대표로서 카운터파트이기도 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대통령과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 전 의원이 청와대에서 회동하기에 앞서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5년 10월 박근혜 대통령과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 전 의원이 청와대에서 회동하기에 앞서 인사말을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 촛불집회는 그만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김 의원)

“네, 제가 촛불집회에 계속 개근하고 있지요.”(문 전 의원)

“지도자는 분노를 증폭시키면 안 돼요. 분노를 다스리고 정치로 해결해야지 부추기면 되겠어요?”(김 의원)

“민심의 분노와 함께 하는 게 정치지요. 그렇지 않고 어떻게 개혁과 혁신을 하겠습니까.”(문 전 의원)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말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야당 유력 대선 주자의 행보는 조금 걱정스럽다. 80을 자기편으로 믿고 20은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해서다. 그 20을 어떻게 포용할지 고민하지 않아서 지지율이 40%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둘의 대화를 바라보며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무렵, 김 의원이 한마디 던졌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가 끝나고 나면 지지자가 아니라 상대편을 바라봐야 해요. 국가 운영하고 국민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데 보수, 진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타협하고 협치하면, 그게 누구든 나부터 전폭적으로 도울 거요.”

대선 출마를 포기한 사람의 ‘쉬운 남 얘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유력 후보에게는 더욱 그렇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지만, 우리 정치사를 돌아보면 영웅이 되레 난세를 만들어왔다.” 한 정치 원로의 말이다. 이 말이 지금처럼 절절하게 들린 적이 없다.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난세에 난 영웅이 또 다시 더 큰 난세를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현실 정치 수준에 비해 과분한 우리 국민은 이제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줄 평범한 정치인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 국민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김지은 정치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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