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에 기자가 다닌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특이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 때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교장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교장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한 상이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장의 무훈담을 그린 만화책도 만들어 나눠주었다.
멸공의 횃불을 교표로 삼은 학교답게 반공교육에 열심이었던 그 곳에서 교장은 아이들에게 대단한 영웅으로 각인됐다. 그 결과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젊은 여교사의 뺨을 때리고 나이 지긋한 교감에게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는 충격적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교장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신성한 교육의 현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영웅 교육을 받은 아이들에게는 교장의 잘못이 보이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집권 전 옥중 구술한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열등 민족으로 규정해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히틀러를 지지한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구 소련을 침공했을 때 친위대가 벌인 잔인한 슬라브족 절멸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사실상 독일군은 히틀러에게 세뇌 당해 도덕적 해이 상태에 빠져 슬라브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소련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독ㆍ소전 초창기 나치 독일의 잔학상이 알려지기 전 많은 소련군이 총부리를 돌려 침략자인 독일군에 가담했다. 1991년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에서만 5만명 이상의 소련인이 독일 군복을 입었다.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였다. 소련 비밀경찰 KGB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스탈린그라드에서만 1만3,500명의 소련군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수 많은 소련군이 나치 독일에 가담한 이유는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전쟁 전까지 권력을 다지려고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유능한 소련의 장성과 장교 3만6,000여명을 죽이고 스탈린 영웅화를 담당할 공산당 정치위원들을 군대에 내려 보냈다. 이것이 소련군 사이에 반감을 불러 일으켜 전쟁 초기 독일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가졌으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이유였다.
뒤늦게 문제를 파악한 스탈린은 방법을 바꿨다. 이때 스탈린이 꺼내든 구호가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 나온 ‘애국 전쟁’이다. 이를 통해 조국과 민족을 스탈린이라는 이름과 동일시하고 반동이라며 교과서에서 삭제한 네프스키, 수보로프 등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군들 이름을 딴 훈장까지 만들었다. 더불어 정치위원들은 ‘조국이 부른다’며 애국전쟁이란 이름으로 병사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집단 최면에 빠트려 전선으로 내몬 애국전쟁은 훗날 스탈린 숭배에 악용됐다며 흐루시초프 등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길게 과거 이야기를 한 것은 요즘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도 세뇌와 선동이라는 역사의 망령 같은 구태가 보이기 때문이다. 커다랗게 ‘멸공’을 써 붙인 차량들이 시내를 돌며 대형 스피커로 시끄럽게 섬뜩한 구호를 내뱉는 풍경은 타임머신을 타고 독재 정권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주장할 수는 있지만 방법이 우악스러우면 공감보다 반발을 가져온다. 그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잘못된 선동의 부작용이다. 세뇌를 통해 일부에게 집단 환각 을 유발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면 더 큰 비판에 직면한다.
안타까운 점은 잘못된 선동의 전면에 나선 사람들의 말로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나 친위대 수장 히믈러, 소련의 KGB를 만든 베리야 등은 독재 권력의 수호자 노릇을 자처했지만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그들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평가 받는 점이다. 그 점이 잘못된 세뇌와 선동에 나선 사람들의 비극이다.
최연진 디지털콘텐츠국장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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