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넘게 한 브랜드 담배만 고집한 직장인 정근희(34)씨는 1월부터 담배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흡연 경고그림만 없으면 된다. 정씨는 “경고그림이 있는 담뱃갑을 보면 담배 피울 생각이 가신다”며 “매일 편의점에 가서 아직 흡연 경고그림이 없는 담배만 골라 피우고 있다”고 말했다.
담뱃갑에 섬뜩하고 거슬리는 흡연 경고그림이 붙으면서 흡연자들이 온갖 회피 수단을 짜내고 있다. 경고그림이 없는 담배를 찾아 다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잘 팔리지 않아 예전 물량의 재고가 남은 담배로 갈아타거나, 각자 기준에 따라 조금이라도 덜 혐오스러운 그림이 실린 담배를 달라거나, 담배케이스에 넣어 다니기도 한다. 심지어 경고그림이 없는 예전 담뱃갑을 재활용하는 ‘알뜰’족도 등장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3일부터 생산되는 모든 담뱃갑 앞뒤 양면(전체 면적의 30% 이상)에 뇌졸중 구강암 피부노화 발기부전 등 흡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질병을 담은 경고그림 표기를 의무화했다.
1일 서울 강남구 한 편의점 직원 박모(27)씨는 “옛날 담배 없느냐”는 질문을 매일 7, 8차례 받는다고 한다. 박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고그림이 붙지 않은 담배가 남아 있었는데 몇 보루씩 사가는 분들 때문에 의무화 시행 두 달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 소진됐다"며 "모두 팔렸다고 하면 그냥 나가버리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이런 손님들 때문에 일부 편의점은 아예 경고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담뱃갑을 거꾸로 꽂아 놓고 있다.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혐오스럽지 않은 그림을 고르는 흡연자들도 늘고 있다. 이마저도 세대별로 갈린다. 20, 30대들은 후두암 구강암 수술 장면이 담긴 담뱃갑을, 중년 남성들은 발기부전을 의미하는 그림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편의점 직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10년째 흡연 중인 정현우(30)씨는 “후두암 구강암 수술 장면을 보면 미래의 나를 보는 거 같아 피하게 된다”고 했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가 많은 건 가족들이 함께 웃고 있는 가운데 흡연자만 사라지는 모습이 담긴 담뱃갑이다. 서울 성동구 한 편의점 주인 강모(45)씨는 “경고그림을 두고 이것저것 고르다 결국 그나마 혐오스럽지 않은 가족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로 골라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라며 “그래서 나머지 경고그림이 그려져 있는 담배 수량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는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원하는 경고그림이 실린 담배를 샀어도 담배케이스에 담배를 담아 다니는 흡연자도 늘었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에 따르면 1월 담배케이스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4%나 폭증했고, 소셜커머스 티몬에서도 최근 6주간 담배케이스 매출이 전년보다 614% 급증했다.
경고그림이 없는 담뱃갑을 버리지 않고 담배만 새로 채워 넣는 사람도 있다. 15년째 흡연 중인 김상진(38)씨는 “어차피 담배 향은 같아서 담뱃갑은 계속 사용해도 괜찮다”며 “경고그림이 보기 싫어서 이렇게라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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