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구찌’의 2017년 F/W 컬렉션은 ‘다양성과 통합’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눈에 띈 점은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하나로 합쳐 버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100여 세트가 넘는 룩이 한번에 등장하는 대형 패션쇼(사진)가 됐다. 구찌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기계적으로 합쳐 놓은 룩이나 이성간 커플룩 같은 전통적 방식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정 성별 용이라 생각되던 라인과 장식이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 뒤섞여 있었다. 패션 분야에서 남녀를 구별하는 게 예전만큼 중요한 경계가 아니라는 메시지였다.
2년 전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들어간 이후 구찌의 패션은 양성적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러플과 레이스, 여성복 특유의 라인 같은 것을 남성복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젠더리스(Genderlessㆍ성의 구별이 없는) 경향이 어느 날 갑자기 구찌에서만 뚝딱하며 튀어 나온 건 아니다. 세상의 변화 추세가 만든 영향이다. 남녀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성적 경향이 있고, 사람들은 패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메시지’ 혹은 ‘그런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세상에 던져왔다. 구별이 무의미해진다면 차별은 이미 모순이다.
이런 흐름 속에 주류 패션계도 발 빠르게 움직여 왔다. 예를 들어 미국 뉴욕 패션위크의 ‘후드 바이 에어’(Hood by Air)는 남녀 구분이 무의미하게 똑같이 생긴 옷을 만든다. 루이 비통은 광고에서 배우 윌 스미스의 아들 제이든 스미스에게 치마를 입혔다. 구찌 뿐 아니라 ‘겐조’ ‘코치’ 같은 브랜드도 남녀 컬렉션을 합친 패션쇼를 시작했다.
이런 트렌드에는 상업적으로도 이미 의미가 있다. 영국의 백화점 ‘셀프리지’는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ㆍ성 중립적인) 섹션을 만들었다. 자라나 유니클로 같은 대중적인 패스트 패션 브랜드도 언젠더드(Ungenderedㆍ성의 구별이 없는) 패션이나 젠더리스 패션이라는 이름의 컬렉션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장사의 측면에서 봐도, 패션 브랜드가 자발적으로 고객을 남성이냐, 여성이냐로 나누어 한정시키는 건 소비자의 수만 줄일 뿐이다. 게다가 패션 브랜드로서는 치명적인 ‘고루한 이미지’만 남을 수 있다.
구찌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이 회사는 올 1월부터 이탈리아의 ‘파크스’라는 단체의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아프리카계 인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의 이름을 딴 비영리시민단체(NGO)인 파크스는 회사ㆍ단체 등에서 인종이나 젠더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방지하고 모두 함께 지낼 수 있는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을 만들자는 목적을 갖고 있다.
남녀 옷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것은 단지 요즘의 트렌드를 따라가며 한 몫 챙겨보자는 발상 차원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부터 세상이 변해가는 방향에 맞춰 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구찌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패션쇼에서 대부분의 모델들을 백인으로 채워 인종 편향성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고 재빠르게 변화를 시작한 결과 지금의 전향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녀 패션의 통합이 앞으로 패션계의 주류가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여기서는 남녀 통합을 앞세운 브랜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각 브랜드들이 서 있는 지점과 내려는 목소리는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디오르’나 ‘프라발 그룽’은 최근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의미 없는 편견을 줄이는 것이다.
트렌치 코트와 MA-1 같은 항공 점퍼도 원래 남성용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코코 샤넬이 살아있을 때 선보인 옷은 당시의 관념을 깨고 남성복에서 많은 요소를 가져왔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점을 신경 쓰지 않는다.
임의적 질서라는 건 어디까지나 임의적이다. 과거의 틀 안에 굳이 자신을 속박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폭넓은 시야와 유연한 사고는 삶 속에 더 다양한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패션이 가진 힘이 아닐까.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macrostar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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