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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드라이브] 당신이 몰랐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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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드라이브] 당신이 몰랐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입력
2017.02.2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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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전 세계에 표명했다. 삼일절은 98년 전의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하는 날이다.

3·1운동을 비롯한 일제 항거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기념비, 사료와 함께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이 서려 있다. 지난 27일 서울 근교에서 만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삼일절에 어울리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없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전시된 위안부 할머니 조각상. 사진 조두현 기자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전시된 위안부 할머니 조각상. 사진 조두현 기자

참혹했던 그 날의 기억,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3·1 만세 시위가 있고 이어 3월 31일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인근 발안 장터에서는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튿날엔 주변 산봉우리에서 봉화를 지피며 만세 행렬을 이어갔다. 일제는 이를 억압하고 보복하기 위해 군경을 파견했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탑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로 왔다. 주민 30여 명을 강연이 있다고 속이고 교회 예배당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무차별로 총을 쏘고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일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렀다. 총칼을 피한 이들은 불에 타 죽었다.

제암리 학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판
제암리 학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판

학살 이후 주민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현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 덕에 유골은 수습됐지만, 사건의 진상 규명은 광복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학살 현장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다. 1982년 9월엔 정부가 나서 유해와 유물을 발굴해 교회 옆 묘소에 합동으로 안장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에는 그때의 끔찍했던 참상과 역사적 사실이 그대로 있다. 제1전시관에선 제암리에서 일어났던 학살에 대해, 제2전시관에선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발생한 3·1운동에 관한 사료를 전시 중이다. 아울러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순국 묘지, 순국기념탑 등이 조성돼 있다.

우리가 몰랐던 대학살, 화성 수촌 교회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있는 수촌 교회 역시 제암리 교회와 함께 같은 날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이틀 동안 수촌 교회 인근 장안면에서 2,0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 한 명이 죽었는데, 일제는 주범으로 수촌리 청년들을 지목했다. 보복에 나선 일제는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검으로 죽였다. 이 과정에서 수촌 교회도 불탔다.

경기도 화성 수촌 교회의 초가집 예배당(좌)과 신식 예배당(우)
경기도 화성 수촌 교회의 초가집 예배당(좌)과 신식 예배당(우)

3년 뒤 선교사 아펜젤러와 노블의 후원으로 8칸 초가집 예배당이 새로 지어졌다. 1974년에 지붕을 기와로 덮었으나 유지 보수가 어려워 1987년에 다시 초가로 복원했다. 이는 현재 화성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돼 있다. 옆에 우뚝 선 교회 건물은 1965년 어느 미국인의 후원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뜨거웠던 그때의 함성,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더불어 서울 이외의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힐 만큼 격렬했다.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해 31일엔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치고 밤엔 등불 행진을 이어갔다. 저항의 열기는 4월 1일과 2일 극에 달했다. 이를 ‘2일간의 해방’이라고도 한다. 시위대는 행진과 함께 일본인 상점을 부수고 면사무소를 공격해 일장기 등을 태웠다.

경기도 안성 3·1운동 기념관의 조형물
경기도 안성 3·1운동 기념관의 조형물

안성 3·1운동 기념관은 이를 기억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건립됐다. 전시관에선 안성 지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물과 기록을 둘러볼 수 있다. 야외엔 당시의 주재소와 우편소 모형이 마련돼 있다.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다양한 형벌 기구들도 체험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광복사에는 순국선열 25명, 애국지사 206명의 위패가 있다.

안성 3·1운동 기념관의 전시관 입구
안성 3·1운동 기념관의 전시관 입구

오는 삼일절 당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다양한 체험 행사가 예정돼 있다. 아이와 함께 태극기 가방, 독립운동가 배지, 독립운동가 필통 등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생생한 일제의 만행, 광주 나눔의 집

이곳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의 터전이다. 불교계와 사회 여러 단체에서 후원해 1992년 서울 서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와 10명의 할머니가 거주 중이다. 할머니들은 그림 전시회와 시위를 통해 일제의 위안부 만행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현재 생존 중인 위안부 할머니는 총 39명으로 이들의 평균 나이는 90.2세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입구에서 소녀상과 함께 있는 위안부 할머니 조각상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입구에서 소녀상과 함께 있는 위안부 할머니 조각상

1998년에 지어진 위안부 역사관에선 좀 더 생생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과 할머니들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나눔의 집 한쪽엔 고인이 된 할머니의 넋을 기리는 위패가 마련돼 있다. 지난 25일엔 삼일절을 맞아 먼저 타계한 할머니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위)과 나눔의 집(아래)으로 가는 길목 곳곳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위)과 나눔의 집(아래)으로 가는 길목 곳곳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저항 시인의 흔적, 서울 윤동주 문학관

지난 2012년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청운동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의 시집과 시가 실린 잡지, 친필원고와 사진 등을 전시 중이다. 특히 물탱크 내부를 재활용해 만든 영상실이 인상적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버려진 물탱크와 수도가압장을 재건축해 지었는데, 훌륭한 공간연출로 호평을 받아 수많은 건축상을 받았다.

서울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
서울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윤동주 문학관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문학관과 이어진 인왕산 자락엔 ‘시인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작은 공원이 조성돼 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이곳과 가까운 당시 누상동 9번지(지금의 종로구 옥인길 57)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며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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