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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정말이지, 대충 살고 싶어서

입력
2017.02.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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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재자 투표부정을 폭로한 이지문 당시 육군 중위가 1992년 5월 4일 이병으로 강등돼 전역한 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사회가 정경유착과 선거비리 등을 바로잡는 데는 이들 공익신고자들의 역할이 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폭로한 이지문 당시 육군 중위가 1992년 5월 4일 이병으로 강등돼 전역한 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사회가 정경유착과 선거비리 등을 바로잡는 데는 이들 공익신고자들의 역할이 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첫째도 둘째도 철저한 대비만이 살 길이다.”

이건 북한도발 방지계획이 아니다. 눈 앞의 부정 부패를 멈추려는 이들에게 ‘제보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다. 부정 선거, 민간인 사찰, 오염혈액 유통 등 비위를 세상에 알린 이들이 미래의 제보자, 신고자에게 전하는 당부를 종합하면 이렇다. “상대는 회유ㆍ보복할 겁니다. 의도가 뭐냐며 뒤를 캐고, 왕따 시키고, 업을 뺐고, 소송도 걸 겁니다. 법이 늘 우리 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록하세요. 할 수 있다면 녹음하고 대비하세요. 그럼 세상이라도, 시간이라도 우리 편이 될 겁니다.”

상대가 정부라면 대응수준은 격상된다. 정부가 은폐를 업으로 삼을 때만큼 무서운 경우도 없다. 일단 “말이 되냐”고 잡아 떼고, “괴담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겁주고, 제보자를 색출하다, 스모킹 건을 들이대야 겨우 대국민사과에 나서는 식이다.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주무관이 언제부턴가 모든 대화를 녹음했던 건 비슷한 이유다. 그의 녹음파일은 MB정부 민간인 불법사찰 실체 규명의 핵심 단서가 됐다.

최순실 게이트 수사에서도 내부자들의 녹음파일, 깨알 메모가 핵심 물증이 되고 있다. 제보자들이 위협받는 일도 반복된다. 정부가 숨기기에 급급한 사이,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최선인 플랜A나 차선인 플랜B로는 모자라 플랜Z, 즉 최후의 보루를 쌓아야 했다.

기괴한 점은 이 플랜Z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거다. 도처 일상에 플랜Z다. 지인인 회사원 K는 약과 세제를 사면 성분표부터 통독한다. 영수증은 강박적으로 모은다. 혹시 몰라 피해 입증에 대비한다고,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의 버릇이라고 했다. 차라리 천연 세제를 만드는 주부 C는 손전등 등을 담은 생존가방을 꾸려 신발장에 뒀다. 아이에겐 생존 수영을 가르친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행태를 보며 강퍅해졌단다. 녹초가 된 인턴 H는 컵라면 후기를 정독하다 잠든다. ‘정규직은 요원하고 1,000원어치 소비도 실패할 여유가 없어서’다.

죽기살기로 최악에 대비하는 이들에게 플랜B는 사치이고, 투명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호사다. 단지 무사하기 위해 늘 필사적이다. 이쯤 되면 간절한 바람은 하나다. 쉬엄쉬엄 살고 싶다. 다시 말해, 이 노역을 나누기로 계약하고도 슬그머니 숨은 정부를 불러 세우고 싶다. 시스템이 진실과 국민의 편이란 순진한 기대 속에 살고 싶다. 삶에 혼신은 다하되 플랜B나 C만 가지고도 무사하고 싶다.

벚꽃 대선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새 통치계약에 누구를 개입시키고 누구를 쫓아내야 플랜Z에서 해방될지를 생각한다. 국민 앞에 거짓 없이, 은폐 없이 일하고, 부당한 지시를 받아 적는 대신 “여기 문제 있다”고 호루라기를 부는 공직자에게 박수칠 건 어느 쪽일까.

거리와 법정에서는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가짜 뉴스도 범람한다. 보고 듣는 게 고역이지만 그 덕에 분명해진다고 생각하면 약간 위안은 된다. 누가 증인과 법관을 협박하는 이들과 손 잡나, 어불성설로 특검 수사 연장을 가로막나, 그럼으로써 진실을 감추나.

앞으로도 광장은 늘 양편으로 왁자지껄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찰 하고도 부인하고, 댓글을 달고도 시치미를 뗄 것이다. 어르신 댁에 가짜 뉴스를 놓아드릴 것이다. 부박한 언어로 증인, 수사관, 법관을 몰아 세울 것이다. 틈을 타 제 영예를 챙길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참과 거짓을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성가셔도 모두가 플랜Z를 짊어진 각자도생보다는 낫다. 진실을 침몰시키는 이를 알아보고, 기억하고, 오래 심판하면 된다. 진실한 증인이 출세하는 세상, 투명하게 통치계약이 작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건 결국 그런 식별안과 집요함이다. 그걸 키우지 않고선 정말이지, 우리가 쉬엄쉬엄 살 도리는 없다.

김혜영 기획취재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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