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타타타’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2)에 삽입돼 ‘국민 가수’가 된 김국환은 복면을 쓰고 MBC 음악예능프로그램 ‘일밤-복면가왕’(‘복면가왕’)에서 지난해 노래를 불렀다. ‘메칸더V’ ㆍ ‘은하철도 999’ 등 유명 만화 주제곡을 도맡아 불러 목소리도 친숙한 데뷔 47년 차 가수가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마이크를 잡은 건 그만큼 설 자리가 없어진 중년 가수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KBS ‘가요무대’와 ‘콘서트 7080’을 제외하면 50대 이상 가수가 지상파 방송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기회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 없다. 올해 나이 예순 일곱이 된 김국환은 ‘복면가왕’에 출연한 최고령 가수였다.
아르헨티나서도 “’복면가왕’ 보자”
목소리만으로 나이와 성별, 장르에 대한 편견 없이 음악에 귀 기울이게 한다는 취지의 ‘복면가왕’이 지난 26일 100회를 맞았다. 프로그램 기획안이 나온 뒤 3년 동안 방송가에서 퇴짜를 맞으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다 우여곡절 끝에 2015년 4월 첫 방송을 탄 ‘미운오리새끼’는 어느덧 MBC 주말 예능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 따르면 26일 ‘복면가왕’은 11.3%의 시청률을 기록, 같은 시간 7.4%를 보인 SBS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인기몰이 중이다.
가창 대결로 듣는 즐거움을 주면서 출연자에 ‘복면’(사실은 가면)을 씌워 시청자로 하여금 퀴즈를 풀 듯 호기심을 자극해 프로그램의 흥미를 돋운 점이 주요했다. ‘복면가왕’ 하이라이트 동영상 누적 재생횟수는 27일(네이버 기준) 약 3억 2,000만 건으로, 2억 4,700만 건을 기록한 ‘무한도전’보다 높다. ‘복면가왕’ 제작진에 따르면 프로그램이 워낙 화제가 되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 프로그램 녹화를 보러 온 방청객까지 있었다.
‘복면가왕’은 시청자들에게 낯선 가수들의 도약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로 분한 가수 김연우(4승)와 ‘여전사 캣츠컬’로 활약한 차지연(5승)이 대표적이다. ‘우리동네 음악대장’이란 별명이 더 익숙한 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9승)는 ‘복면가왕’으로 스타가 됐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원우 작가는 27일 한국일보에 “‘복면가왕’을 통해 하현우의 목소리가 시청자들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밴드의 음악에도 귀를 기울이게 돼 뿌듯했다”고 의미를 뒀다. 대중 음악 시장이 아이돌 음악에 편중된 상황에서, 밴드 음악의 대중화에 길을 열어준 계기를 만들어 뜻 깊었다는 설명이다.
한국어 노래 부른 밀젠코, 고정 출연도 포기한 신봉선
‘복면가왕’의 백미는 ‘반전’이었다. 미국 밴드 스틸하트 멤버인 밀젠코 마티예비치는 복면을 쓰고 한국어로 노래를 해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했고, 힙합 듀오 다이나믹 듀오 멤버인 개코는 랩이 아닌 노래를 불러 반전을 줬다.
박 작가는 기억에 남는 ‘복면가왕’ 반전 출연자로 ‘아버님 제가 가왕 될게요’의 방송인 신봉선을 꼽았다. 신봉선은 패널로 나온 가수 김현철로부터 “한영애”라는 추측을 이끌어 낼 만큼, 가면을 벗은 뒤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한 출연자 중 한 명이다.
사전 준비가 ‘007 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철저하게 진행돼 가능했던 ‘역대급 반전’이었다. 제작진에 따르면 신봉선은 ‘복면가왕’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고정 출연 중이던 패널도 몇 주 동안 쉬었다. 방송인 이윤석이 “(신)봉선이 잘린 거냐?”며 스태프 등에 안타까움을 털어놓을 정도로, PD와 작가를 제외하곤 신봉선이 무대에 오르는 일을 아는 스태프가 없었다. 제작진에 ‘중년 가수 콘셉트’란 주문을 받은 신봉선은 실제로 말투고 바꾸고 ‘중년 아줌마’처럼 살았다는 후문이다. 단발이었던 그는 ‘복면가왕’ 패널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녹화 당일 긴 가발을 준비해 와 머리스타일까지 바꿨다. 제작진은 가수 외 배우나 방송인을 섭외할 때 직접 부른 노래가 담긴 녹음 파일을 듣고 출연 여부를 결정한다. ‘복면가왕’의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제작진은 새로운 반전을 위해 1년 동안 배우 A씨에 러브콜을 보내며 섭외 물밑 작업에 한창이다.
“클레오파트라 복면 무섭다고 부정적”… 제작 뒷얘기
‘복면가왕’의 예능 1등 공신은 ‘복면’이다. ’황금락카 두통썼네’부터 ‘로맨틱 쌍다이아’ 등 기상천외한 가면을 출연자 얼굴에 씌워 볼 거리를 제공했다.
특이한 만큼, 가면 제작과 관련한 뒷얘기도 많다. ‘복면가왕’의 가면을 제작하고 있는 황재근 디자이너에 따르면 ‘음악대장’의 가면은 매주 바뀌었다. 수염을 붙이고 떼는 것부터 턱도 깎아 ‘성형대장’이 따로 없었다. 황 디자이너는 “클레오파트라 가면은 처음엔 제작진이 ‘무섭다’며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김연우씨가 가면을 쓰고 귀엽게 춤도 추고 해줘서 캐릭터가 생기고, 가면에도 유머가 깃들었다”며 복면 제작의 지평을 넓혀준 사례로 꼽았다.
‘복면가왕’ 녹화 한 번에 필요한 가면은 최소 8개다. 처음엔 우아한 분위기의 가면 제작을 주로 했지만, 최근엔 만화 캐릭터 같이 귀여운 가면을 주로 만든다. 보통 출연자가 복면에 맞춰 무대 의상을 준비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황씨는 “배우 문희경씨는 무대에서 입을 의상을 갖고 와 ‘이 의상에 맞는 복면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후다닥 새로 만들어 혼을 뺀 적이 있다”며 웃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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