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사냥꾼
조원희 글, 그림
이야기꽃 발행ㆍ36쪽ㆍ1만3,000원
‘오, 두 손을 물속에 잠그라/ 손목까지 잠그라/ 들여다 보라, 대야물 속을 들여다 보라./ 무엇을 잃었는가 생각해보라’ (W. H. 오든의 시 ‘어느 날 밤 산책을 하며’ 부분)
세수를 하다가 한때 늘 품고 다니던 오든의 시구가 생각났다. 3분이면 해치우는 세수가 길어졌기 때문인데, 손톱을 바투 깎아서 다친 손가락과 종이에 베인 또 하나의 손가락 덕분이다. 세면대 물에 잠근 손들이 떠올린 것은 잃은 것, 실패한 것, 놓친 것 뿐이 아니었다. 버린 것과 놓아버린 것도 떠올랐다. 그렇다. 생각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으면, 그 생각을 길어 올릴 끈질긴 시선이 없으면, 너무도 자명한 사실들에조차 얼굴을 돌리게 된다. 눈 감게 된다.
‘이상한 꿈, 지독한 현실’이라고 부제를 단 조원희의 그림책 ‘이빨 사냥꾼’은 인간의 상아 남획을 ‘코끼리 족속의 거인 치아 사냥’으로 뒤집어 그리면서 ‘무엇을 잃었는가’에 대한 혹독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코끼리들이 활로 쏘아 잡은 거인의 입을 열어 톱과 스패너로 이를 뽑고 나르고 선별하고 경매해 나눈 다음, 다듬고 깎아 만든 장식품과 장신구를 팔고 사며 즐긴다. 자주색 물감을 흠뻑 먹인 장지에 그려진 치아 소재 코끼리상이며 촛대며 목걸이며 파이프와 시계와 선글라스와 도자기가 진열된 고급 상점가 쇼윈도, 그 앞을 오가는 우아한 쇼퍼 코끼리들 모습이 기묘하게 섬뜩하다. 다행히 여기까지, 줄곧 글 없는 그림만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들은 한 아이의 악몽이다.
그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아이는 그야말로 ‘지독한 현실’과 맞닥뜨린다. 어른들이 저마다 코끼리 이빨을 지고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고 아이는 마음먹지만, 상아를 옮기기에 바쁜 사람들은 아이의 악몽 이야기를 들을 성싶지 않다. 듣는다 해도, 그 노획물을 불편해 하거나 그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 같다. 여행 선물로 건네는 상아 도장이나 상아 거울을 받으면서 우리가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멀티미디어디자인을 전공한 조원희 작가는 수채 물감과 함께 과슈ㆍ사인펜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세련된 그림으로 우리를 불편한 진실 앞에 불러 세운다.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작업으로서 ‘이빨 사냥꾼’ 이전에도 ‘얼음 소년’ ‘혼자 가야 해’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를 통해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평화로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림책으로 펼쳐 내었다. 영화 ‘혹성 탈출’이 보여 준 ‘원숭이가 지배하는 행성’만큼이나 이 그림책이 보여 준 코끼리 이빨과 사람 이빨, 코끼리 사냥과 사람 사냥, 상아 공예품과 치아 공예품이 치환된 세계는 어떤 독자에게든 강렬한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이빨 사냥꾼’이 2017 볼로냐 라가치 픽션 부문 특별언급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여전히 뒤숭숭한 새해에 처음 접하는 기쁜 일이다. 2014년에 출간된 이 그림책 속 ‘사람 이빨을 노리는 코끼리 사냥꾼’이 새삼 ‘상아를 노리는 코끼리 밀렵꾼’들을 놀라게 했을 리 만무하겠지만, 혹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코끼리 밀렵이 궁극적으로 상아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유전자 풀(pool)을 이뤘다’는 지난 11월 영국 발 섬뜩한 뉴스가 심사위원들에게 이 그림책을 떠올려 주었을까. 이 그림책이 지상에서 영원히 코끼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촉발해 그런 연구 결과를 내놓게 되었을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책의 힘이다. 더구나 이토록 강렬한 이미지가 이야기하는 그림책의 힘이라면! (세계 상아 수요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2017년 안에 상아 매매를 금하고 상아 가공 공장을 폐쇄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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