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잡기 쉽지 않은 ‘악역’
무명 배우들의 배역 쟁탈전 치열
‘재심’ 백철기 役 위해 5개월 준비
* ‘강남 1970’ 만나며 인생역전
사투리 대사로 단역서 조연으로
영화 이후 황정민 소속사와 계약
35세까지 백수였다. 10여 년간 고시원을 전전했다. 불과 2년까지 전 서울 대학로 인근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20만원의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월세를 몇 달씩 밀리기 일쑤였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유하 감독의 영화 ‘강남 1970’(2015)을 만나면서 하루아침에 인생이 역전됐다. 이제 관객들은 그를 두고 ‘신 스틸러’라고 부른다. 영화 ‘검사외전’(2015)과 ‘사냥’(2016), ‘재심’(상영 중)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사로잡는 그의 영화들이 늘고 있다. 영화계 데뷔 14년 만에 얻은 ‘봄날’이다. 포악하고 잔인한 악역을 전담하고 있는 배우 한재영(39)이 최근 한국일보를 찾았다.
악역? 쉽지 않은 세계
한재영은 지난해 1,000만 배우의 영예를 안을 뻔 했다. 관객 900만명을 모은 ‘검사외전’이 도약대였다. 부패 검사 우종길(이성민)의 뒷일을 봐주는 조폭 장현석을 연기하며 관객의 시선을 훔쳤다. 정작 그는 “프로필에서 빼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고 했다. 쇠파이프를 들고 한치원(강동원)을 공격하거나 우종길이 부은 뜨거운 물에 얼굴이 데이는 등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도 말이다. 2015년 배우 황정민의 소속사 샘컴퍼니에 들어가 만난 첫 작품이었다. 그는 “안일하게 연기했다”고 말했다.
120만 관객을 모은 ‘재심’을 이야기하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10대 소년 현우(강하늘)에게 살인죄 누명 씌우는 악랄한 형사 백철기로 변신했다. 손목시계를 풀고선 “네가 죽였잖아!”라며 주먹을 날리는 연기에 소름이 돋는다. 단역을 벗어났던 영화 ‘더 게임’(2007)을 시작으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2013), ‘황제를 위하여’(2014), ‘강남 1970’, ‘검사외전’, ‘사냥’까지 내리 6개의 작품에서 깡패 역할을 했다. 그는 “쉽지 않은 연기가 악역”이라고 말했다. 남들이야 무서운 인상만으로 “악역은 떼놓은 당상”이라 할 수 있지만, 수 많은 무명 배우들이 배역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재영은 백철기 역할을 위해 5개월을 준비했다. 노력은 결과로 돌아왔다. 그는 ‘재심’에서 “반 이상을 애드리브”로 채웠다. 현우를 구타할 때 내뱉는 대사는 80%이상 애드리브다.
인복이 살린 연기재능
하늘은 한재영에게 ‘인복’을 줬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밤 12시까지 하는 자율학습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공부엔 젬병이었다. “문학선생님이 연기학원을 추천”했다. 학원을 다니면 자율학습을 빠질 수 있어 “억지로” 다녔다. 그렇게 연기와 인연을 맺었다. 어렵사리 전남 나주의 동신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지만 취업의 희망도 없었다. 졸업한 이후에도 컴퍼스를 떠돌았다. 학과 교수님이 “대학로의 한 극단 대표가 선배이니 한 번 가보라”고 권유했다. 25세 때 서울에 올라왔다. “연애도 한 번 못했을 정도”로 연기에만 매달렸다. 연극이 끝나면 극단 동료들과 술 마시고 다음날 연기하는 생활을 10년 동안 반복했다. 연 수입이 100만원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야쿠르트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 등 하시면서 어렵게 저와 남동생을 키우셨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극단 생활로는 돈을 모을 수도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광주에서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가 운영하는 횟집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회 써는 기술만 잘 배워도 최하 월급 500만원”은 보장됐기 때문이다.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겸하던 선배 배우가 그를 붙잡았다.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며 집을 얻어주고 생활비도 손에 쥐어주었다. ‘친구2’ 오디션을 통과해 김우빈의 계부로 등장했다. ‘강남 1970’도 원래는 여섯 장면에 나오는 깡패 단역이었다가 이민호 옆에 붙어 다니는 창배를 연기하며 인생 역전의 계기를 맞았다. 느닷없이 대본을 읽어보라던 유하 감독은 한재영의 전라도 사투리 대사를 듣더니 “네가 해라”며 그 자리에서 캐스팅했다.
황정민과 한솥밥을 먹게 된 것도 ‘강남 1970’ 덕이다. 한 모임에 우연히 나갔다가 김태호 샘컴퍼니 본부장을 만났다. 술잔을 기울이며 친해졌다. “그 바쁜 정민이 형이 제 영화를 보고 오케이 하셨나 봐요. 그래서 소속사 대표님 만나 계약했고요.”
“‘인간극장’ 보며 우는 싸나이”
“콧수염 때문에 더 무서워 보이죠?” 그는 험상궂은 외모를 콧수염 탓으로 돌렸다. 휴대폰을 집어 든 그는 “콧수염 없는 사진 보여드릴게요”라며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의 휴대폰 케이스가 깜찍했다. ‘후드티 라이언’으로 불리는 캐릭터 상품이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직접 온라인커머셜 사이트에서 주문한 것”이라고 했다. “원래는 ‘하트 라이언’을 주문했지만 품절됐다고 해서 이걸 고른 거예요.” 민망한 듯 활짝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악역 전문 배우가 맞나 싶었다. ‘반전 매력’이었다. “하나 주문해 드릴까요? 하트 라이언으로요.”
일이 없는 날은 TV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낸단다.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리얼 다큐멘터리 장르. KBS1 ‘인간극장’과 EBS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를 볼 때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본인도 놀란다고. 그의 말만 들으면 울보 수준이다. “제가 험상궂어 보이지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에요. 감수성이 남다른 거 아닌가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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