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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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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

입력
2017.02.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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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성폭력 사태 등 이후

작가 스스로 ‘검열’하거나

편집자가 수정 요청하기도

“윤리적 글쓰기” 등 긍정평가

서효인 시인은 최근 펴낸 시집 '여수' 맨 뒷면에 실은 시인의 말을 통해 "수년간 발표한 시를 모으니 그때는 몰랐던 여성혐오가 지금은 보여 빼거나 고친 시가 몇 있다.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부분이다"고 밝혔다. 서효인 제공
서효인 시인은 최근 펴낸 시집 '여수' 맨 뒷면에 실은 시인의 말을 통해 "수년간 발표한 시를 모으니 그때는 몰랐던 여성혐오가 지금은 보여 빼거나 고친 시가 몇 있다.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부분이다"고 밝혔다. 서효인 제공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은 작품에서 ‘여성혐오’가 엿보이는 시어를 고치거나 다시 썼다.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시 ‘마산’에서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을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으로 바꾸는 식이다. 시 ‘서귀포’에서 제주 4ㆍ3항쟁을 회상하는 표현은 발표 당시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지만, 이번 시집을 묶으며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꿨다.

서 시인은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폭력적인 장면이나 처연한 분위기를 살리는 장면에서 여자를 폭력의 제물로, 배경적 소재로 써 왔던 게 한국문학 특유의 버릇이었던 것 같다” 고 말했다. 서 시인은 여성 편집자에게 자신의 시에서 여성혐오 표현이 있는지 정교하게 읽어 달라고 요청했고, 의견을 적극 수용해 표현을 바꾸고 시집에 넣기로 했던 몇 개 작품을 뺐다.

지난해 시작된 페미니즘 논쟁과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이후, 작품 속 여성혐오 표현을 수정하는 현상이 문단 내 새 풍경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 시인처럼 작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는가 하면, 편집자가 여성혐오 논란이 우려되는 부분을 수정 요청하는 경우가 생겼다. 백다흠 은행나무 출판사 편집장은 “문예지 청탁 원고를 받을 때 여성혐오 오해를 살만한 문장, 구절이 있으면 작가에게 요청해 조정하고 있다”며 “수정을 요구하면 대개 ‘그렇게 읽힐지 몰랐다’며 바꾸곤 한다”고 말했다. 박준 창비 한국문학팀 편집자 역시 “페미니즘 논란 후 편집 기준에 여성혐오 여부가 추가된 건 사실”이라며 “작가 성별을 떠나 남성 또는 여성을 성(性) 대상화를 시키는 작품은 교정지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적어 수정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문학계는 이런 변화를 “문학 속 여성혐오를 되돌아 볼 전환점” “새로운 미학을 발견하는 계기”라고 평가한다.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이광수 김동인 소설부터 톨스토이 ‘부활’까지 근대 문학은 젠더 불평등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1970~80년대 민족문학 논쟁보다 젠더 논쟁은 훨씬 더 혁명적일 수 있다”고 평했다. 문단 성폭력, 한국문학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은 몇몇 작가의 일탈로 치부할 게 아니라 제도와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평론가는 다만 “작가가 자기 작품 속 여성혐오를 인식하느냐는 도덕이 아니라 문학정치의 문제”라며 “작가에게 이 부분을 강제할 수는 없고 당대 독자의 지지, 후일 문학사에서 평가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주의 관점이 표현의 자유나 상상력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은 오히려 억측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작가가 편집자 의견을 수용해 글을 퇴고하는 건 원론적인 출판 과정”(이수형 문학평론가)이며 “여성작가, 여성화자는 그동안 남성중심 사회에서 훨씬 더 큰 억압에 항시적으로 노출돼왔다는 점에서 자기검열이란 변명은 낡은 프레임”(이광호 평론가)라는 것이다. 권명아 문학평론가는 “인간은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압력을 통해서 겨우 바뀌는 존재”라며 “여성혐오든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든 (사회적 압력 없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제대로 쓰고 있는 건가? 부지불식간에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닌가’하는 성찰이 문학의 글쓰기, 윤리적인 글쓰기”라고 덧붙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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