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북한 국적의 핵심 용의자 4인이 사실상 수사 불가 지역인 북한 평양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국의 수사가 미결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현지 경찰은 도주범들의 신병 확보뿐 아니라 범행에 사용된 독극물 분석에도 난항을 겪고 있으며, 정부의 급격한 입장 변화 또한 경찰의 수사 진척을 방해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19일 오후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김정남 시신의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않으면서 피살 사건의 핵심 증거물인 독극물의 정체를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시사했다. 암살에 직접 가담한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29ㆍ여)과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ㆍ여)가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 얼굴에 분사한 독액 스프레이는 수사 초기 ‘청산가리보다 독한’ 물질로만 알려진 후 부검 과정에서도 구체적인 성분이 밝혀지지 않았다. 시신 부검은 지난 15일 시작됐다.
이에 범행에 사용된 독극물이 일반적으로 유통되지 않는 새 화학물질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19일 말레이시아 일간 더스타에 따르면 현지 정상급 독물학자는 “범인들은 통상적인 화학물질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암살 배후세력이 특정 용도에 맞춰 화학물질을 생산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여러 화학물질을 섞었을 경우 종류 파악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국내 전문가들도 해당 독극물 분석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법의학자 이정빈 단국대 석좌교수는 “보통 ‘사용 가능성’이 있는 물질 목록을 대상으로 반응 검사를 하는데, 해당 목록에 없는 물질을 사용했다면 검사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여러 독극성 물질을 혼합했을 수 있다는 분석에 대해 이숭덕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암살이라는 뚜렷한 목적에 비해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반박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대북 관계에 있어 외교적 입장을 정하지 못한 것도 수사 결과 발표 지연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에 비교적 우호적이던 말레이시아는 강철 주 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가 17일 밤 김정남 부검에 불만을 표시하는 등 북한이 잇단 주권침해 행보를 보이자 대북공세로 전환한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정부의 고위 간부들이 북한을 향해 자국 법 준수를 촉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베르나마통신 등에 따르면 다투크 세리 수브라마니암 보건장관은 18일 “피살 사건 수사는 북한이 아닌 이곳의 법에 따라 진행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현지 경찰 수장인 탄 스리 칼리드 빈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도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의 법과 규정을 따라야 하며, 여기에 북한도 포함된다”고 꼬집었다.
현지 경찰의 입장 변화는 김정남의 시신 인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경찰은 16일만 해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시신을 북한에 인도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17일 유족의 DNA 샘플 제출을 인도 요건으로 제시, 19일 공식 기자회견에서는 “시신 인도는 유가족에 우선권이 있다”고 선회했다. 정확한 신원 확인을 위해서라지만, 김정남의 유족이 북한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시신을 북한 정부에 인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ㆍ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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