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팬 클럽의 전신은 1980년대 민주산악회와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각 김영삼(YS)ㆍ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 두 사람의 대선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5공 시절 정당이 해산돼 정치 활동이 제한되자 YS와 DJ는 친목단체를 내걸고 우회적으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YS는 ‘등산 정치’라는 말을 만들어 낸 민주산악회를 1981년 세웠다. 연청은 1980년 DJ 장남 김홍일 전 의원 주도로 만들어졌다가(첫 이름은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산된 뒤 주선회(酒仙會), 홍익상조회를 거쳐 87년 다시 뭉쳤다. 별동대, 친위대로 간주되는 이들 조직은 당 안팎의 주요 선거 때 동원됐으며 그 공로로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의 요직을 꿰차며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팬클럽의 등장은 1990년대 말부터다. 1998년 만들어진 ‘창사랑(이회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2000년 출범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정치인ㆍ정당이 설립을 주도하고 직ㆍ간접적으로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정치인 팬클럽의 효시다. 창사랑 창립 멤버인 이모씨는 “이회창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아쉽게 패한 뒤 대구의 젊은 지지자들이 PC통신 채팅방에서 다음 대선에 재도전 할 수 있게 준비하자고 뜻을 모아 이듬해 모임을 띄웠다”고 말했다. 노사모는 2000년 4ㆍ13 총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종로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게 계기가 됐다. 노사모 창립 멤버인 최모(41)씨는 “20,30대 지지자들이 ‘노하우’라는 인터넷 팬클럽에서 낙선한 노 후보를 도울 방법을 찾자고 해서 모였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정치인 노무현의 가치를 공유하고 알리는 데 치중했다”고 전했다.
정치인 팬클럽은 인터넷에서 지지ㆍ비판 의사를 활발히 표현하는 문화와 함께 발전했다. 2002년 사상 첫 국민참여경선으로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노사모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사건이었다. 노사모는 절대 약세였던 노 후보의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었고, 본선에서도 소액 후원금을 모으는 ‘희망돼지 저금통’ 아이디어를 내고, 노란 목도리, 노란 풍선 등으로 유세장을 노랗게 뒤덮는 등 당과 보조를 맞춰 선거운동을 벌였다. 12월 대선 직전 노사모 회원은 8만 명까지 늘었다. 대전 지역 노사모 대표인 임재원(42)씨는 “노 후보가 지지율 하락으로 민주당 내에서 후보교체론이 일었을 때, 후보를 바꾸자는 의원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손편지와 꽃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4년 만들어진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역시 충성도 면에서 노사모 못지않다. 박사모는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앞장섰으며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막는데 헌신적이다. 최근 탄핵 기각을 주장하는 ‘태극기 집회’의 주역이다.
거물 정치인들은 다수의 팬클럽을 거느릴 정도로 팬클럽은 일반화됐다. 지난해 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팬들이 대거 당원에 가입하는 등 최근에는 당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현상을 보인다. 약 10만 명의 민주당 새 당원 중 상당수가 문 전 대표 지지자들로 추정되는데, 당 대표와 최고위원 선출에 자신의 표를 행사하려는 것이다. 문 전 대표 공식 팬클럽 ‘문팬’에서 활동 중인 김기문(53)씨는 “당원 가입을 통해 응원하는 정치인이 당내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당의 정책 결정에도 목소리를 내려 한다”고 말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정치인을 좋아하고 소통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을 이해하고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팬클럽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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