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피살사건(13일)이 발생 사흘째를 맞으면서 현지 수사 당국이 여성 용의자 2명을 비롯, 달아난 남성 용의자 4명이 공범으로 모두 살인 청부를 받은 암살단이라는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다. 체포된 용의자들이 석연 찮은 행동과 황당한 진술 등으로 사건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남은 용의자들을 신속히 검거하지 못할 경우 김정남 암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청부 살인 가능성 높아져
현지 중국어 신문인 동방일보에 따르면 현지 경찰은 체포된 여성 2명과 도망간 남성 4명이 김정남 암살을 의뢰받고 임시로 구성된 청부 암살단이라는 쪽으로 잠정결론을 내린 상황이다. 특정국가 정보기관 소속 공작원일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이들이 북한의 공작원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에 소속된 요원들과 달리 임무가 없을 때는 일반인처럼 생활하다가 일단 지령을 받으면 암살자로 활약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결국 이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는지, 단순히 김정남 개인 문제와 얽힌 것인지는 달아난 남성 4명에게 달려 있는셈이다. 청부 암살단인 만큼 각 용의자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용의자 6명이 모두 붙잡히기까지 배후에 누가 서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배후뿐 아니라 ‘배후의 배후’도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달아난 남성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진상 규명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한편 독극물 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남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도 여전히 명쾌하지 않다. 현지 언론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전날 김정남 부검 과정을 잘 아는 소식통을 인용, 김정남 얼굴을 포함한 신체에 아무런 주사 자국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독침설’보다는 독극물이 발린 천 또는 스프레이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독살이 아닌 저혈당, 쇼크 등 자연사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도 나온다.
현장에 같은 옷 입고 다시 나타난 용의자?
이들이 전문적인 살인청부 집단이라는 말레이시아 당국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미리 잡힌 여성 용의자들의 행동이 어설픈 점은 의혹을 증폭시킨다. 인파로 붐비는 오전 시간대 공항 한 복판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준비된 차량도 없이 택시를 타고 도주한 점도 의아하지만, 붙잡힌 용의자가 요인 암살 임무를 맡은 전문 공작원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어이 없게 체포됐기 때문. 15일 오전 체포된 첫번째 용의자인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은 사건 현장인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다시 찾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사건 당일 얼굴을 가리지 않아 폐쇄회로(CC)TV에 그대로 신분이 노출됐고, 체포 당시에도 13일 입었던‘LOL’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자수’에 가까울 정도로 신분 노출에 무방비한 상태였다는 얘기다. 다만 이 용의자가 체포 당시 매고 있었던 하늘색 크로스백에서 독약이 든 병이 발견됐다는 현지 보도가 나오는 등 수사 당국은 이 여성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 확보에 진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장난으로 가담했다는 베트남 여성 정체는
베트남 여성의 경찰 진술도 의심스럽다. 동방일보는 체포된 베트남 국적 여성 용의자가 공항에서 만난 남성 4명으로부터 “승객들에게 장난을 치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16일 붙잡힌 인도네시아인 여성 용의자와 함께 김정남에게 접근해 한 사람이 얼굴에 액체를 분사하고 다른 한 명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으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지만, 이 용의자는 “그 남자들이 장난이라고 말했다. 살인인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경찰에 자신이 베트남의 유명 인터넷 스타이며 패러디 영상을 찍으러 왔다고 얘기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단순 가담자로 볼 수 있는 진술이다. 반면 이 여성이 범행 은폐를 시도하는 등 계획적으로 암살을 기도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이날 일본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이 여성은 사건 발생 전날인 12일 공항 인근의 한 호텔에서 이틀 간 투숙 예약을 했다. 피살 사건 직후인 13일 오후 호텔 직원이 그를 봤을 때는 전날 길었던 머리가 어깨 위로 올라올 정도로 짧았다고 한다. 자른 머리카락 때문에 청소원이 불만을 표시했다는 호텔 직원의 진술도 보도됐다. 이 여성은 2박을 예약하고 요금까지 먼저 지불했지만 “인터넷 접속이 안된다”며 하루 만에 호텔을 나갔다고 한다.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변장을 시도하고, 황급히 도주했다는 점에서 조직적 가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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