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과 두 딸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서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그들의 극심한 괴로움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의 한 재판정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보조출연자로 일하다 방송기획자 등 12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30대 자매가 연이어 자살하고 그 충격에 아버지마저 뇌출혈로 목숨을 잃은 ‘엑스트라 자매 자살 사건’. 대질신문에 지친 피해 여성의 고소 취하로 12명은 무혐의로, 이후 민사소송은 소송시효 때문에 흐지부지 끝나면서, 억울함에 1인 시위를 했던 어머니 장모씨에게 명예훼손의 죄를 물을 것인가를 묻는 자리에서, 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자책과 반성을 거듭 얘기하면서 “부디 이 판결이 피고인 여생에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두 자매의 안식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며 말을 마쳤다.
판결문을 구해,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판사의 말을 들으며, 장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측하건대 사건이 시작됐던 10여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렸을 것이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딸의 고백이 떠올랐을 것이고, ‘더 이상 살아 뭐 하겠니’라는 큰 딸 유서가 기억났을 것이고, ‘언니가 보고 싶다’는 작은 딸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의 사과에, 장씨의 마음은, 응어리로 뭉쳤을 한(恨)은 온전히 풀렸을까.
2015년 3월, 미국의 변호사인 마티 스트라우드씨가 지역 언론에 기고문을 보냈다. 수신인은 스트라우드 변호사가 검사 재직 시절 살인 혐의로 기소해 사형수가 됐다 재심으로 3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인물. 변호사는 기고문에서 “사형이 선고됐을 때 정의가 구현됐다는 사실에 기뻤고 흥분했다. 오만했고 승리에 도취돼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이 겪은 엄청난 비극에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기고문에는 본인의 과오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자 경험상, 우리 검사나 경찰관이 이처럼 사과하거나 미안함을 표시한 사례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몇 년 전 자살방조 혐의를 받았던 강기훈씨가 재심에서 24년 만에 누명을 벗었을 때도 검찰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사과할 일 아니다”는 얘기가 나왔다. 강씨를 포함, 지금도 수 많은 사건들이 재심을 거쳐 무죄로 뒤바뀌고 있지만,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법원이 간혹 과거를 반성하는 판결을 내지만, 이들은 ‘그런데 뭐?’라는 식이다. 무죄가 나오면, 다시 판단해 달라면서 ‘항소’를 하는 일도 다반사다. 조사를 받으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억울한 기소에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을 흘렸을 이들을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듯이 말이다. 마치 사과와 반성의 DNA 자체가 없다는 듯이.
뒤(과거 사건)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수사기관의 특성 때문인지, 검찰ㆍ경찰 조직엔 과거 선배들의 독직ㆍ실수ㆍ권한남용에 대해 관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번 장씨 판결을 전해들은 한 경찰관은 “(우린) 법대로 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할 정도다.
법을 다루는 기관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법대로 하는 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다. 유신정권 시절이나 독재정권 시절 일어난 수많은 간첩 조작ㆍ고문 사건들도 따져보면 법 대로 한 일이다. 정의와 인간에 대한 고려를 쏙 뺀 채, 법 대로만 하면 된다는 기계적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법은 강자의 편이며 법조문은 약자에게 흉기가 된다.
물론 그들은 ‘실수’라는 말도 곧잘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용납이 되려면, 실수에 대한 수사기관의 자성과 재발 방지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사법체계에선 이 같은 사과가 법정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반성과 사과는 결코 판사만의 몫이 아니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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