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발목 잡은 것도 안종범ㆍ정호성 기록
상부 비정상적 지시에 “메모만이 살 길”
박영수(65) 특별검사팀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측을 도운 정황을 확보한 데는 실무자급 공무원의 메모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상급자들의 지시에 혼선이 생기자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당시 상황을 꼼꼼히 적어 놓은 일지 형식의 메모다. 상식을 벗어난 상부 지시와 사태 전개에 공무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메모와 녹음파일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핵심 단서가 되고 있는 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특징인 셈이다.
12일 특검과 공정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특검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후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는 과정에 특혜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3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당시 특검은 2015년 12월 삼성SDI가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 지분을 6개월 내 강제처분하도록 권고를 내린 부서의 A 서기관 사무실 컴퓨터에서 심상치 않은 ‘메모’를 발견했다. 일지 형식의 메모에는 정재찬(61) 공정위원장이 통합 삼성물산 지분 1,000만주를 처분 권고토록 결재한 사안을 며칠 뒤 김학현(60) 당시 공정위 부위원장이 500만주로 축소한 지시 내용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A 서기관은 특검 조사에서 “위원장 결재까지 난 사안을 부위원장이 뒤집는 지시를 내려 나중에 위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상부 지시사항을 어길 수는 없었지만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일지를 작성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특검에 소환돼 “김종중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을 만나 삼성SDI 관련 요청을 받았고, 이러한 내용과 관련해 최상목 당시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현 기획재정부 차관)과 수시로 논의했다”고 실토했다. 특검은 10일 정 위원장과 김 사장을 불러 조사한 데 이어 최 차관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윗선’의 지시 여부를 추궁했다.
‘최순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뻗친 권력형 비리의 실체를 드러낸 게 비단 A 서기관 메모만이 아니어서 박근혜정부의 공직사회 분위기를 가늠케 한다는 평가다. 안종범(58ㆍ구속기소)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작성한 업무수첩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사초’(史草)라는 말까지 나왔다. 지금까지 검찰과 특검에 제출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은 총 56권이다. 정호성(48)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폰 녹음파일도 마찬가지다. 정 전 비서관의 녹음파일은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의 국정 개입 행태가 가감 없이 드러나 특검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심리에서 주요 증거로 쓰이고 있다.
정부 부처의 한 관계자는 “상부에 복종해야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나중에 문제가 될 비정상적인 지시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떠맡지 않기 위해 근거나 기록을 남길 수 밖에 없다”며 “안 전 수석이나 정 전 비서관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