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멕시코 작가 라우라 에스퀴벨의 장편 소설이자,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 1992년 만든 동명 영화다. 덕분에 ‘초콜릿의 맛은 달콤하고 쌉싸름하다’는 관용적 표현이 생겨났다. 그러나 초콜릿 맛이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쌉싸래한 것만도 아니다. 달콤함과 쌉싸래함은 초콜릿 맛의 일부에 불과하다. 초콜릿은 그보다 훨씬 많은 맛을 숨기고 있다.
초콜릿은 농작물이다. 품종과 토양에 따라 맛이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얘기다. 동시에 초콜릿은 음식이다. 쇼콜라티에(초콜릿 장인)의 창의력에 따라 한 알의 초콜릿에서 무한대의 맛을 낼 수 있다.
카카오 나무에서 초콜릿이 되기까지
초콜릿은 음식 문화사에서 대단히 젊은 음식이다. 적도 부근 남미 대륙에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카카오 나무는 기원전부터 존재했지만, 현재의 초콜릿이 탄생하기까지는 3,000여년이 걸렸다. 멕시코 남부의 올메크인들이 달콤새콤한 과육을 가진 과일로서의 카카오 열매에 맛을 들여 재배하기 시작했고, 마야인들에게도 전해졌다. 마야와 교역한 아즈텍인들은 카카오 열매를 종교 의례에 쓰는 음료로 만들었다. 카카오 열매의 씨앗을 볶고 갈아 만든 최초의 초콜릿 음료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카카오 열매와 그 가공 음식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 초기의 초콜릿은 향을 약간 첨가한 기름지고 탁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들어 과자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향신료로도 쓰였다.
현대적 의미의 초콜릿이 등장한 건 고작 200년 전인 19세기의 일이다. 18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카카오 콩 무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카카오버터를 분리해 코코아 분말을 얻는 기술이 개발됐다. 1847년 영국에선 카카오버터를 첨가해 부드러운 맛을 낸 씹어 먹는 고형 초콜릿이 발명됐다. 1876년 스위스인인 앙리 네슬레가 건조 우유 가루를 개발했고, 다니엘 페터가 이를 이용해 밀크 초콜릿을 처음 만들었다. 밀크 초콜릿은 다크 초콜릿이 유행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했다. 1878년엔 역시 스위스인인 루돌프 린트가 콘칭(Conching) 기계를 개발했다. 콘칭 기술로 거칠고 뻣뻣하던 초콜릿이 곱고 부드러운 질감을 갖게 됐다.
한 알의 초콜릿을 얻는 데는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다. 카카오 나무 열매의 씨앗은 그저 떫고 쓴 견과류에 불과하다. 산지에서 수확한 카카오 열매를 통째로 후텁지근한 공기에서 발효시키면 화학 작용으로 맛이 달라진다. 새로운 맛을 품게 된 카카오 콩을 건조하는 것이 초콜릿 제조의 첫 단계다.
유럽이나 미국의 초콜릿 제조사는 말린 카카오 콩을 사들여 볶은 뒤 갈아서 리큐어를 만든다. 설탕과 바닐라 같은 항신료를 첨가해 며칠 간 혼합하는 과정을 거치면 그제서야 초콜릿 맛이 난다. 이 과정이 콘칭이다. 여기에 우유 고형분을 넣으면 밀크 초콜릿이 된다.
초콜릿, 미식의 영역으로
콘칭까지의 공정은 주로 대형 제조사들이 한다. 프랑스의 발로나(Valrhona)와 카카오바리(Cacao Barry) 벨기에의 칼리바우트(Callebaut) 벨코라데(Belcolade) 등이 세계적인 프리미엄 초콜릿 제조사로 꼽힌다.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초콜릿 완제품보다는 쇼콜라티에가 사용하는 커버처(Covertureㆍ중간 가공 상태의 초콜릿)에 주력하는 회사들이다.
요리사에게 고기와 채소가 재료라면, 쇼콜라티에의 재료는 커버처다. 커버처는 초콜릿이 유연한 질감을 갖도록 카카오버터를 배합한 것으로, 지방 비중이 31~38% 정도다. 1kg 이상의 대형 블록 또는 동전 모양이다. 초콜릿 제조의 마지막 공정인 템퍼링(Tempering)은 딱딱한 커버처를 녹인 뒤 치대며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작업으로, 부드러운 질감을 내기 위해서는 세심한 온도 관리가 필요하다.
초콜릿의 맛에 대한 소비자들의 고정 관념은 달고 쌉싸래하다는 것이었다. 초콜릿은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기호 식품이라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밸런타인데이를 비롯한 기념일과 이벤트 용 상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최근엔 다크 초콜릿 또는 밀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카카오 버터를 주재료로 만든 초콜릿으로, 엄밀히 말하면 초콜릿이 아니다) 등으로 소비자의 취향이 분화하고 있다. 다음은 초콜릿 산지와 품종을 구분해 골라 즐기는 단계로 갈 차례다.
초콜릿은 여러 면에서 커피와 비슷하다. 우선 산지 분포가 같다. 적도를 따라 분포하는 ‘커피 벨트(커피 재배가 가능한 지역)’가 곧 ‘카카오 벨트’다. 열매의 품종, 지역, 토양에 따라 맛 차이가 확연한 것 역시 같다. 커피 시장에서 ‘싱글 오리진(단일 원산지의 원료를 사용한 제품)’이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은 것처럼 초콜릿도 마찬가지다. 쇼콜라티에들은 각각의 초콜릿이 지닌 고유한 맛을 이용해 한 알 한 알 모두 다른 맛의 초콜릿을 만든다. 프리미엄 초콜릿 제조사들은 각 산지에서 난 카카오로 싱글 오리진 커버처 라인업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라인업마다 맛이 모두 다른 건 당연한 얘기. 초콜릿 브랜드의 개성에 따라 여러 산지의 것을 균형 있게 배합한 블렌딩 라인업도 있다. 블렌딩 커피와 같은 개념이다. 카카오도 와인과 마찬가지로 테루아(재배 조건)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싱글 오리진 초콜릿에는 와인처럼 그랑 크뤼(Gran Cruㆍ최고 등급) 개념이 적용된다.
개성 있는 산지별 초콜릿 맛 느낄 수 있는 초콜릿 전문점
국내에 일찌감치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출시한 쇼콜라티에가 있다. 서울 서래마을의 과자 전문점 ‘오뗄두스’다. 일본에서 경력을 쌓은 정홍연 대표는 4년 전부터 초콜릿 라인업에 싱글 오리진 개념을 도입했다. 초기 소비자들의 반응은은 별로 뜨겁지 않았다. 정 대표는 실망하지 않고 초콜릿을 녹이고 굳히는 작업을 묵묵히 반복했다. 오뗄두스의 봉봉(부드러운 가나슈를 넣은 한 입 크기의 초콜릿)은 벨코라데 제품을 가나슈(초콜릿 크림)로 사용하는데, 봉봉마다 사용하는 커버처가 다르다. ‘얼그레이 봉봉’은 다크 55% 컬렉션과 밀크 35% 컬렉션 커버처를 섞어 만든다. 얼그레이 향에 어울리는 ‘간’을 맞춰 맛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정 대표는 “초콜릿도 음식인 만큼 간이 중요하다”며 “보관하는 온도ㆍ습도에도 예민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민 가수 에디트 삐아프의 이름을 딴 ‘삐아프’는 식당으로 치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견줄 만한 고급 초콜릿 전문점이다. 서울 가로수길 뒤편에 자리한 매장은 보석 가게처럼 우아하며, 명품 초콜릿의 대명사인 발로나 제품을 사용한다. 삐아프의 아름다운 케이스에 담긴 봉봉은 오너 쇼콜라티에 고은수씨가 내놓는 ‘초콜릿 코스 요리’다. “초콜릿 케이스는 요리의 접시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답게 플레이팅된 요리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초콜릿도 보기 좋은 것이 훨씬 맛있게 느껴지기 마련이죠. 초콜릿을 케이스에 담는 순서에도 의미를 담습니다. 맛이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점점 묵직하고 강한 것으로 순서대로 맛보시라고요. 그래야 초콜릿 맛을 하나하나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고씨가 초콜릿 케이스 선택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고씨는 초콜릿과 부재료의 조화도 중시한다. “예를 들면 발로나의 퓨어 오리진 그랑크뤼 제품 중 ‘만자리’는 산미가 강해요. 붉은 과일과 견과류의 향이 나요. 산딸기와 조합하면 초콜릿이 가진 고유의 풍미가 더욱 살아납니다.” 개성 있는 오리진 초콜릿들은 각각 과일의 새콤함이나 견과류의 고소함, 비옥한 토양의 향기, 연기의 매캐한 냄새까지 품고 있다. 고씨는 그런 초콜릿들을 미식의 관점에서 다루는 쇼콜라티에다.
경기 수원의 ‘초코동이’는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판매한다. 카카오바리와 칼리바우트 제품을 사용해 싱글 오리진 초콜릿 바 9가지를 만든다. 산지에 따른 맛과 향을 온전히 집중해 즐기는 데는 봉봉보다는 바 형태가 적합하다고 한다.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만든 지는 2년쯤 됐어요. 소수 마니아층은 알고 찾아 오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아직 낯선 개념이에요. 설명을 듣고 시식을 해보면 초콜릿 맛이 제각각이라는 것에 다들 놀라고 재미있어 하세요.” 김정은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최근 초콜릿 업계의 화두인 빈투바(Bean to bar)를 꾸준히 시도 중이다. 빈투바는 ‘카카오 콩(Bean)에서 초콜릿 바(Bar)까지’, 즉 카카오 열매 발효부터 로스팅, 콘칭까지 직접 해서 자기만의 초콜릿 맛을 내는 기법이다. 초코동이는 발효 건조한 에콰도르 콩을 사용해 각각 100%, 90%, 81%, 72% 카카오 함량의 다크 초콜릿 바를 만든다. 김정은 대표는 “대형 제조사의 커버처는 안정적인 맛을 내고, 빈투바는 만들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재미가 있다”며 “같은 지역의 콩이라도 조금씩 맛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빈투바의 매력을 설명했다.
싱글 오리진과 그랑 크뤼에서 빈투바까지. 업계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초콜릿의 맛이 다양해지고 있다. 그 중 취향에 꼭 맞는 초콜릿 산지 하나쯤 가져보면 어떨까. 초콜릿도 커피나 와인, 시가 같은 ‘기호 식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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