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하는 사장님을, 꼰대 같은 부장님을 오도독 씹어먹어 버리고 싶다면? 껌이라도 사서 씹자. 마침 ‘사장껌’ ‘부장껌’이 나왔다. 웅진식품의 신입사원이 아이디어를 내 개발한 상품이다. 그 역시 입사하자마자 직장인의 비애를 절감한 때문일 터.
사장이나 부장 이름이 붙은 껌을 씹는다고 과연 화가 풀릴까?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7일 ‘부장껌’을 씹어 봤다.
기자1= “껌이 왜 이리 질겨? 부장과 1대 1로 싸우는 느낌이야.” (잘근잘근 씹는 식감을 위해 껌 코팅을 일부러 두껍게 만들었다는 게 제조사 설명이다.)
기자2= “서랍에 숨겨 놨다 부장 몰래 씹어야지.”
기자3= “스트레스가 풀리는지는 모르겠는데, 부장 얼굴 보며 씹으니까 기분이 묘해.”
문화부장= “재미는 있네. 하지만 내 앞에서 대놓고 씹는 건 절대 불허!”
이 땅의 ‘을’들에게 필요한 껌 목록은 끝도 없다. 시댁껌, 장모님껌, 남편껌, 고객님껌, 엄마친구아들껌, 명절연휴껌, 대출이자껌, 월요일껌, 마감껌… 오비디우스는 “고통을 반기라, 그 고통에서 배움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던가. 뭔가를 집요하게 씹는 턱 근육의 통증에서 우리는 스트레스 해소를 얻는다. 씹기는 윗니와 아랫니가 입 속에서 은밀하고도 끈질기게 벌이는 ‘소심한 저항’이다.
밥벌이의 환멸을, 을의 신세를… 씹기 열풍
요즘 간식 시장의 키워드는 단연 ‘씹기’다. 껌과 젤리, 캐러멜, 말린 과일, 건어물 같은 추잉 푸드(Chewing Foodㆍ씹어먹는 질긴 음식)가 대세다. 특히 젤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 요구르트, 사이다, 과일주스, 숙취 해소제 등 온갖 음료수부터 아이스크림, 과자까지 젤리 형태로 만든 컬래버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요구르트 젤리는 상점 진열대에 깔렸다 하면 품절되는 귀한 몸이다. 요구르트 젤리를 간신히 구했다는 득템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두룩하다.
요구르트 젤리를 내놓은 롯데제과의 연간 젤리 매출은 2014년 115억원, 2015년 142억원에서 지난해 320억원으로 훌쩍 뛰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국내 사탕 시장(4,100억원)의 약 60%를 젤리(2,400억원)가 차지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전했다. 소수의 젤리 마니아들이 해외 직구로 공수했던 미국 ‘트위즐러’와 독일 ‘하리보’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추잉 푸드가 수입된 반짝 유행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恨)’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인지, 우리는 유난히 질긴 음식을 좋아했다. 마른 오징어, 쥐포, 문어 다리, 양, 곱창, 엿에 불량식품 쫀드기까지. 퇴근 후에는 쫄깃한 막창을 구워 먹으며 직장 상사를 씹어 댔고, 아슬아슬한 올림픽 결승전 중계를 보면서 오징어와 땅콩을 열심히 씹었다. 술안주의 대명사였던 건어물이 최근엔 대낮에 즐기는 간식으로 변신했다. 한 입 크기로 자른 오징어, 가리비, 쥐포 등이 편의점에서 스낵처럼 팔린다. “만병의 근원인 직장 상사를 생각하며 뽀득뽀득 씹어 드세요!” 말린 오징어 제품 ‘오잉’의 마케팅 문구다.
씹기의 미학…씹으면 진짜 풀린다
우리가 씹는 것은 실은 추잉 푸드가 아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거나, 처연한 을의 신세이거나, 불안한 미래다. 또는 나를 괴롭힌 그X의 인격이거나. 거칠게 씹을수록 마음이 더 후련해지지만, 아무리 억세게 씹어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씹기는 입 속에서 휘두르는 안전한 복수의 칼날이다.
‘씹다’가 ‘누군가를 뒤에서 헐뜯고 욕한다’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강희숙 조선대 국문과 교수는 “씹기는 음식물을 입 안에 넣은 채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행위”라며 “나를 화나게 한 대상을 분이 풀릴 때까지 말로 난도질한다는 뜻으로 확장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씹는 동작에 집중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잊게 된다”며 “공포 영화가 더위를 잊게 하는 효과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또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힘든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무력감”이라며 “껌을 씹는 사소한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무력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씹기가 건전한 스트레스 해방구이자 위약(Placebo)이라는 얘기다.
씹기의 스트레스 해소 효과는 의학적으로도 입증됐다. ▦10분 이상 껌을 씹으면 내분비 체계가 반응해 스트레스가 감소한다(치과보철학 저널ㆍ2014년) ▦씹는 행동이 학습능력은 끌어 올리고 스트레스와 우울증은 완화시킨다(식욕 저널ㆍ2012년) ▦비정기적으로 껌을 씹으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내려간다(스트레스와 건강ㆍ2012년) ▦씹기가 뇌의 미주신경을 자극해 심박수가 떨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구강재건 저널ㆍ2002년) 등 무수한 논문이 발표됐다.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노로 떨 수 있다면 우리는 동지다.” 체 게바라의 말이다. 부조리를 발견할 때마다 함께 분노에 떠는 동지가 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피곤하다. 차라리 오징어를 나눠 씹는 동지가 돼 보자.
당연한 얘기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인 씹기는 위험하다. 전용운 미소나래치과 원장은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오래 씹으면 턱 관절이 닳아 없어지고 치아에 금이 가거나 깨질 수 있다”며 “사각 턱이나 안면 비대칭 같은 영구적 부작용을 얻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당장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면? 선택은 당신 몫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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