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장이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으로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검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를 사실상 인정하며 예술가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김해숙(63) 국립국악원장은 7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우면당 재개관 기자간담회에서 “저로서는 마음 아픈 일”이라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국악원 블랙리스트 논란은 2015년 11월 예정된 국악 앙상블 ‘앙상블시나위’의 ‘소월산천’ 공연을 2주 앞두고 국악원이 프로그램 변경을 요구하면서 불거졌다. 본래 ‘소월산천’은 ‘앙상블시나위’와 연출가 박근형이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협업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지만 국악원은 박 연출가가 맡은 연극을 빼고 음악 연주 중심으로 공연할 것을 요구했다. 극장 시설과 연극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앙상블시나위’는 박 연출가를 제외하라는 요구를 거절했고 이 공연은 결국 취소됐다. 이후 안무가 정영두를 비롯해 젊은 예술가들의 1인 시위 등 항의가 이어졌고, ‘소월산천’을 기획했던 국립국악원 금요공감의 김서령 예술감독 역시 사퇴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박 연출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5 창작산실 우수 공연작품 제작지원’ 사업에서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로 지원 대상에 선정됐지만 예전 작품으로 인해 자진사퇴를 강요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연출가의 2013년 연극 ‘개구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한 내용이 담긴 탓이다.
김 원장은 “정부의 압력이 있었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있었죠. 없었다고는 못 하죠”라고 답했다. 그는 ‘소월산천’ 공연 취소 당시 KBS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미국 출장 중이었고 귀국 후 담당자로부터 ‘소월산천’이 자연음향 국악공연장에 맞지 않는 공연계획서를 제출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정부의 블랙리스트 검열 의혹을 시인하면서도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립국악원도 피해를 입었다.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블랙리스트 관련 지침이) 옳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문체부 소속기관으로서 100% 나 혼자만 결백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국악인 입장에서는 예술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정치에 연관되는 건 싫다”면서도 “국가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국악원이 국가기관이라는 입장이 단순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피해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소낙비를 맞은 것 같다”며 “공연취소는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라며 사과하기도 했다.
이날 김 원장의 발언은 예술기관 수장으로는 블랙리스트 관련 문체부 방침을 따랐던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사과한 박정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입장 표명이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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