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8명
해녀 된 사연ㆍ악동질 했던 추억 등
직접 글 쓰고 그림 그려 책 펴내
이달 말까지 한라도서관서 전시
“한평생을 누구 어멍(엄마의 제주어)이라고 불리다가 작가님이라고 해 주니 진짜 작가가 된 기분입니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에 사는 정순경(86) 할머니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글로 그림책을 펴낸 어엿한 작가다.
정 할머니는 1년 전까지만 해도 평생 한 번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본 적도 없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한글만 겨우 읽고 쓸 줄 안다. 13세부터 바다에 뛰어들어 물질(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작업)을 50년 가까이 해 온 해녀였고, 자식 4명을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만 해 오던 제주지역 어촌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들 중에 한 명이다.
하지만 ‘글·그림 정순경’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내 나이 열여덟’이라는 그림책 표지에 인쇄돼 발간된 이후 정 할머니는 동네에서 ‘스타’가 됐다. 이웃 중 한 명은 책을 들고 와 정 할머니의 사인까지 받아 갔다.
정 할머니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로 만든 그림책을 읽은 손주가 눈물을 흘리며 정말 잘 썼다고 말할 때 너무 기뻤다”며 “동네 이웃들도 그 나이에 그림도 배우고, 글도 써서 책을 냈냐고 칭찬을 너무 많이 해 줘서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4일 제주시 한라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진행된 ‘제1기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 창작그림책 원화전’ 개막 행사에는 정 할머니를 포함해 8명의 ‘늦깎이 작가들’이 2개여월 만에 다시 만나 웃음꽃을 피웠다. 9개월에 걸쳐 직접 만든 그림책들이 전시된다는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관람객들이 꼼꼼히 그림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전시회는 이달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어르신그림책학교는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이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7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진행한 그림책 강좌다. 72세부터 86세까지 어르신 8명이 총 30회에 걸쳐 수업에 참여했고, 참가자 전원이 그림책을 완성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절을 견디면 살아왔기에 그림이라는 것은 이번 강좌에서 처음 해 보는 생소한 도전이었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칠하기 연습부터 시작해 동그라미를 그리고 선을 그리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붓과 색연필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1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배운 실력으로 그린 그림은 어딘가 어설퍼 보였지만, 여기에 이들이 살아온 아픈 역사와 녹록하지 않은 삶을 이야기하듯 제주어로 풀어내 그림책을 완성했다.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해녀가 된 사연부터 열한살 꼬마가 뙤약볕 아래에서 어머니와 밭일을 했던 이야기, ‘칠공주’를 내리 낳아 마음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를 지켜보는 어린 딸의 시선, 어릴 적 친구들과 악동질했던 추억 등 부모 세대들이 겪었던 다양한 삶들로 그림책을 채웠다.
이날 참가자들 중 ‘청일점’인 양달성(75) 할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난 옛날 추억과 비뚤비뚤하게 그린 그림이 그림책으로 변해 내 손에 쥐어졌을 때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며 “나이가 들면서 눈도 어둡고, 귀도 잘 안 들리면서 내 인생도 점차 꺼져 가는 불씨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그림책 때문에 삶에 대한 의지가 다시 생겼다”고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강영미 설문대어린이도서관장은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그림을 못 그린다,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소극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성껏 그려 내는 그림과 힘든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글로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며 “이번 강좌가 끝난 후에도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등 자신감에 찬 어르신들의 얼굴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강 관장은 이어 “올해는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농촌마을 몇 곳을 정해 돌면서 그림책 강좌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제주=글·사진 김영헌 기자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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