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신이 머물다간 순간이 있다.” tvN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가 배우 조우진(38)에게는 특별하게 들렸다. 이 드라마가 그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OCN 드라마 ‘38사기동대’를 마친 조우진에게 ‘도깨비’ 연출자 이응복 PD가 연락을 해왔다. 이 PD는 “드라마 잘 봤다.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고, 조우진은 “몸과 마음이 수고로워야 결과가 좋은 것 같다”고 답했다. 평범한 대화였다. 그때 이 PD가 성큼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같이 수고를 해보자”면서.
최근 한국일보에서 마주한 조우진은 “지금도 그 순간이 실감나지 않는다”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날 이 PD는 대본의 김 비서 관련 부분을 건넸다. 도깨비 가문을 보필하고 가신(家臣) 후계자 유덕화(육성재)를 보호자처럼 돌보는 인물이다. 조우진은 “도깨비 가문에서 온갖 대소사를 도맡아 하려면 빈틈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외모를 반듯하게 꾸미고 똑 부러지는 어투로 연기했다. 그러면서도 사려 깊고 다정했다.
“작은 역할”을 큰 쓰임새로 만든 건 오롯이 그의 연기다. 김신(공유)과 유 회장(김성겸)에겐 충직한 부하로, 지은탁(김고은)에겐 키다리아저씨로, 유덕화에겐 삼촌이자 직장 상사이자 인생 선배로 다가갔다고 했다. 위태로운 삶을 사는 이들 곁에 김 비서가 있어서 든든하고 안심이 됐다. “김 비서는 관계 맺음을 통해 어떤 인물인지가 드러나요. 어떤 측면에선 신의 ‘권한대행’이기도 하죠. 그런 김 비서에겐 타인의 행복이 삶의 목표였을 겁니다.”
김 비서가 늘 진중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유덕화의 투정에 응수할 때는 유쾌한 만담의 한 장면 같았고, 유 회장에게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과 엑소를 설명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깜짝 춤을 춰 반전의 재미를 줬다. “유재석씨가 춤 추는 모습에서 ‘흥’을 빌려와 포인트 안무만 했는데, ‘완벽 소화’라고 하니 당황했습니다(웃음).” 에필로그 방송에서는 시청률 20% 공약으로 그룹 트와이스의 ‘TT춤’도 췄다. “극한직업 김 비서”라는 표현이 꼭 맞는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쇠톱으로 팔 다리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잘라낼 수 있는 악인. 영화 ‘내부자들’의 조 상무를 어찌 잊을까. 조우진은 “감독의 연출을 철저히 따른 결과”라며 자신을 낮춘다. “일반 직장인이 업무 처리하듯 연기했어요. 빨리 퇴근하고 싶은데 손봐야 할 누군가 때문에 야근하려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조 상무가 평범한 가장이라면 더 소름 돋지 않을까 싶어서 결혼반지를 껴보기도 했습니다.”
조 상무는 조우진의 인생을 바꿨다. 도깨비가 방망이라도 휘두른 듯 어디선가 뚝딱 튀어나온 연기파 배우의 등장에 한국영화계가 들썩거렸다. 조우진은 “한 손에 쇠톱을 들고 뒤에 하이에나를 거느린 조 상무 그림을 팬에게 선물 받았다”며 “지금도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다”고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 이전 조우진이 지나온 길은 조금 험했고 고단했다. 1997년 외환위기사태로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곧장 생업 전선에서 뛰어들었다. “어떤 일을 해야 보람 있게 살 수 있을지 인생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찾은 답”이 바로 연기였다. 대본집을 독파하며 혼자서 연기를 익혔다. “한번은 무작정 대학에 지원한 뒤 실기 시험 보는 자리에서 교수에게 연기에 대해 궁금한 걸 물었죠. 어처구니없어 하던 그 표정이 잊히질 않네요(웃음).”
1999년 그간 모은 돈을 들고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6개월간 극단 워크숍에 참여해 연기를 배웠고, 2000년 그토록 바라던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업은 마치지 못했다. “적지 않은 학비를 들일 텐데 완성된 배우로 사회에 나올 자신이 없었어요. 계속 돈도 벌어야 했고요.” 조우진은 다시 대학로로 갔다. 연극을 하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주유소, 편의점, 물류창고 등에서 일을 했다.
2009년 또 한번 변화를 모색했다. 영화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직접 프로필을 만들어 캐스팅 에이전시를 찾아 다녔고, 자신을 알리는 스티커를 붙인 비타민음료도 돌렸다. 영화 오디션은 100번 이상 떨어졌다. 그렇게 얻은 첫 배역이 SBS 드라마 ‘산부인과’(2010)의 단역이었다. 첫 영화인 ‘마마’(2011)에선 유해진의 조폭 부하로 나왔다. 이후 SBS ‘무사 백동수’(2011) ‘비밀의 문’(2014) ‘별에서 온 그대’(2014) MBC ‘닥터진’(2012) ‘구가의 서’(2013)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 ‘최종병기 활’(2011) ‘관능의 법칙’(2014)에 단역 출연했다. “작품에 녹아 들어 일조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쉽게 오지 않더군요. 기억 못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니까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전에 프로필을 돌린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조감독과 1차 오디션을 봤다. 1시간이 금세 흘렀다. 사흘 뒤 이번엔 감독이 그를 불렀다. 더 큰 배역을 연기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스스로 연기가 불만족스러워 기대를 접었는데, 또 사흘 뒤 전화가 왔다. “확정입니다.” 영화 ‘내부자들’이었다. “당산철교를 지나던 지하철에서 캐스팅 확정 전화를 받았어요. 그날 창밖에 지던 노을 빛이 지금도 떠올라요. 지하철 탈 때마다 생각납니다. 그 순간 신이 잠시 머물다 간 건 아닌가 싶어요.”
조우진은 “내 각오가 흔들릴까 봐, 괜한 마음의 파도가 일까 봐, 주변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하던 대로”가 유일한 목표다. ‘남한산성’ ‘VIP’ ‘보안관’ ‘원라인’ ‘리얼’ ‘형제는 용감했다’ ‘강철비’ 등 올해 준비된 영화만 무려 7편이다. 그리고 지금 극장엔 ‘더 킹’이 걸려 있다. 신이 그를 자주 찾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신과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 ‘도깨비’에서처럼 저승사자 앞에 앉는다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우진이 답했다. “하늘에도 배우라는 직업이 있냐고 물어볼 것 같습니다. 배우를 계속 할 수 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하늘로 향하는 계단에 오를 겁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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