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2.7
전후 한반도 문제를 두고 미국과 소련이 정한 원칙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5년 8월 15일의 일반명령 제1호, 즉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 점령이었고, 또 하나는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를 거쳐 단일 국민국가로 독립시킨다는 ‘모스크바 협정(45년 12월)’이었다.
하지만 임정 수립 절차와 방법 등을 논의하기 위해 46년 3월과 47년 5월 열린 미ㆍ소공동위원회는 예상대로 결렬됐다. 이미 냉전은 시작되고 있었고, 임정 주도권을 어떤 정치집단에게 주느냐의 문제는 협상으로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공을 유엔으로 넘겼지만 유엔의 원칙, 즉 인구비례에 의한 입법부 구성안은 소련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안이었다. 가능한 유일한 방안이 단선ㆍ단정, 다시 말해 남북한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이었다. 48년 1월 6일 입국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측(소련)의 거부로 38선을 넘지 못했고, 서울 등 남한의 주요 도시 노동자들도 일제히 파업을 단행함으로써 단선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유엔 위원단 내에서도 캐나다와 호주 등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단선ㆍ단정 조치에 반대했다. 1948년 새해가 그런 불안과 갈등 속에 열렸다.
그리고 2월 7일, 2ㆍ7폭동이라고도 하고 2ㆍ7구국투쟁이라고 불리는 남한 대규모 파업ㆍ봉기가 시작됐다. 5월로 예정된 제헌국회 단독선거와 분단정부 수립에 대한 전국적ㆍ조직적 저항이었다. 배후의 중심에는 남조선노동당이 있었지만, 김구 등 상당수 민족주의 진영도 가세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주요도시 철도파업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됐고, 부산에서는 항구가 봉쇄됐다. 가두시위가 이어졌고, 각급 학교도 동맹 휴학으로 동참했다. 경남 합천 밀양 등에서는 농민들이 경찰 지서를 공격하기도 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박세길 저, 돌베개)에 따르면, 2ㆍ7투쟁 참여 인원은 약 200만 명이었고,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조직적이었다. 그 열기는 단정 수립 반대라는 정치ㆍ이념적 명분보다 미군정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서 더 뜨겁게 뿜어 나왔을지 모른다. 실업난과 기근,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 친일파의 여전한 득세에 시민들과 귀국파들은 분노했다.
2ㆍ7투쟁으로 100여명이 숨지고 8,500여 명이 투옥됐다. 하지만 그 피해는 두 달 뒤의 제주 4ㆍ3사건에 비할 게 아니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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