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돼먹은 진보 벗고 품격의 아이콘으로
2003년 의원선서에 면바지 차림 등장
날카로운 언어 탓 노인폄하 논란까지
막말 논란 때마다 도매금으로 비난받아
#2
정계 은퇴 뒤 ‘썰전’ 출연하며 변신
여유-유머 넘치는 모습에 팬덤도 생겨
공방만 넘치는 한국 정치의 거울로
2003년 4월 2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닷새 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3인의 국회의원이 의원선서를 하기 위해 발언대에 나왔을 때다. 한나라당 의석에서 갑자기 야유와 고성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퇴장해, 퇴장.” 유시민 당시 개혁국민정당 의원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흰색 면바지에 회색 라운드 티셔츠, 남색 재킷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민주당 쪽에서도 “탁구 치러 왔냐. 국민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고함이 나왔다. ‘저런 옷차림으로 국회를 무시한 사람에게 의원 선서를 받을 수 없다’며 한나라당 의원 30여명이 집단 퇴장하고, 여야 수석부총무는 협의에 나서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양심의 문제이니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며 만류하고, 급기야 국회의원 선서는 다음날로 미뤄졌다. 이튿날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와 무사히 의원선서를 마쳤지만, 이 ‘빽바지 소동’은 ‘싸가지 없는 진보’의 이미지가 훗날 폭발적으로 유통되게 만들었다. 옷차림 문제만이라면 정치권의 권위주의적 문화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에 그칠 수 있었지만, 이후 숱하게 논란이 된 그의 차갑고 날 선 언어는 한 젊고 유능한 정치인을 ‘빽바지 입은 싸가지’의 이미지로 박제해 버렸다.
지난 발언들을 살펴보자. 정계 입문한 2002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호남 출신 의원들을 일러 “이들이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과연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했느냐. DJ 신임만 받으면 개똥이건 소똥이건 전부 할 수 있는 3, 4선이다. 그게 무슨 자랑스런 훈장이냐”고 싸잡아 폄하했다. 이어 장상 총리서리 국회 인준 부결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책임을 언급하면서는 “DJ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다. 하야해야 한다고 본다”고 쏘아붙였다. 2004년에는 한 기독교지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교회의 설교들이 대중을 무지와 미몽 속에 묶어 놓고 있으며 사람을 마취시키는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교회를 다 때려부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4년 한 강연에서는 “비록 30, 40대에 훌륭한 인격체였을지라도, 20년이 지나면 뇌세포가 변해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된다. 제 개인적 원칙은 60대가 되면 가능한 책임 있는 자리에 가지 않고, 65세부터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노인폄하 논란을 빚었다.
종교, 노인, 정치인, 국가상징, 공무원 등 발화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폄하 논란을 빚었던 그의 언어들은 시중의 속어였던 싸가지를 정치적 담론의 분석틀로 승격시켰지만, 유 전 장관 자신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비판을 매우 뼈아프게 받아들였다. 2005년 같은 당 김영춘 의원이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고 한탄한 발언이 너무도 광범위하게 흥행하면서 “정치인으로 치명상을 입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그는 “내 면전에서 재승박덕이라는 평을 해준 사람도 여럿 있다. 그렇다. 내게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지적을 받아들여 내 어법이나 행동방식을 교정할 의향이 없다. 더 중요한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온라인 매체 기고문에서 썼다.
이후 오래도록 ‘싸가지 진보론’이 거론될 때마다 소환돼온 그는 2013년 정계를 은퇴한 이후 전격적으로 변신했다. 예상 밖의 극적 전환은 지난해부터 패널로 출연하기 시작한 JTBC 시사오락프로그램 ‘썰전’을 통해 이뤄졌다. 유시민이라는 이름과 싸가지라는 단어를 연관 짓기 머쓱할 정도로 유머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선보이며 새로운 팬덤 현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함께 출연하는 전원책 변호사가 흥분해 목소리를 높일 때 오히려 유 전 장관이 나서 그를 진정시키고, 그 표현마저 배려 넘치도록 온화하다. 이런 태도로 명석한 논리와 폭넓은 통찰이 더욱 빛난다는 평가다.
주부들이 많이 모이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최근 올라온 ‘‘썰전’ 유시민 섭외는 신의 한 수’라는 글에는 50개 가까이 댓글이 달렸다. “화 내지 않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대단하네요” “너무 흥분하고 냉소적으로 발언하는 게 거슬렸었는데 이젠 많이 유해져서 보기 편해요” “참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인데 도드라져 보이는 몇몇 특징만으로 매도되는 게 너무 마음 아팠어요. 이제라도 진가가 제대로 평가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같은 찬사 일색이었다.
2013년 정계 은퇴 선언 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정치를 그만둔 뒤에도 공격받을 거예요. 무책임한, 싸가지 없는. 이미 붙여놓은 딱지들이 계속 따라다닐 거라고 봐요”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예견은 틀렸다. 이제 유시민은 그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품격 있는 정치평론가, 작가로 일컬어진다. 정치인 시절 유 전 장관이 이런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한국 정치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어쩌면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기에, 즉 더 이상 상대 정당ㆍ정치인을 반박하고 공격할 필요가 없기에 이 같은 여유와 배려가 비로소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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