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질 서워드(Jill Saward)
1986년 3월 6일 일요일 오후, 영국 런던 일링(Ealing) 자치구 목사관. 영국국교회 목사 마이클 서워드(Michael Saward)와 21세 딸 질(Jill), 질의 남자친구 데이비드 커(David Kerr)는 함께 TV를 보며 담소 중이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마이클이 아무런 경계심 없이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건 술과 마약에 취한 4인조 복면 강도였다. 주범 로버트 호스크로프트(당시 34세)와 앤드루 번은 마이클과 데이비드를 묶고 금고 있는 곳을 대라며 크로켓 배트로 무차별 구타했다. 나머지 둘(마틴 맥콜, 크리스토퍼 번ㆍ당시 22세)은 질을 칼로 위협하며 2층 침실로 끌고가 강간했다. 질은 ‘임신도 못 하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등 강간범들이 내뱉는 비열한 말들 사이사이 아버지와 연인의 처절한 비명까지 견디며,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나중에 저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네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야 해.’ “나는 철저히 감정을 차단했다.(…) 폭행 중 그들이 지껄이는 말들을 흘려 들으며 가능한 한 모든 디테일에 집중했다.”(가디언, 2008.7.1)
주말 한낮 목사관에서 벌어진 그 야만적인 사건은 ‘일링 목사관 강간사건’으로 불리며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언론사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고, 일부 타블로이드 신문은 이성을 잃었다. ‘더 선’ 등은 사건 직후 교회를 다녀오던 질의 전신 사진을 찍어 눈만 가린 채 프런트 페이지에 게재하는 ‘특종’경쟁에 취했다. 11개월 뒤 올드베일리(Old Bailey) 형사법원(Crown Court)에서 범인 3명(크리스토퍼 번의 형 앤드루는 수감 중 죄수들에게 폭행 당해 숨졌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검찰은 질이 성경험이 없었다는 점, 다시 말해 ‘완벽하게 순결한 희생자’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죄의 무게를 늘리려 했다. 법정에서도 질은, 적어도 겉으로는 의연했다. 훗날 아버지 마이클은 “(질은) 장기간 심리 치료를 받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상황이었지만 흔들리고 상처받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딸은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더 타임스, 17.1.7)
판사 존 레너드(John Leonard)는 그 모습을 오해했다. 그는 강간에 가담하지 않은 주범 호스크로프트에게는 강도죄로 14년 형을, 강간을 범한 둘에게는 강도죄(5년)와 강간죄(각 5년과 3년)를 적용해 각각 10년 형과 8년 형을 선고하며 “피해자의 정신적 외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 형량을 경감(lenient course)한다”고 판결문으로 밝혔다.(가디언, 17.1.5) 여성단체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나서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성토했다. 대처 총리도 “매우 유감(deep concern)”이라고 밝혔다. 가장 크게 절망한 건 물론 질을 포함한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강간에 더해, 너절한 법과 제도, 법원 검찰 언론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나태한 성범죄 인식에 상처 입고 분노했다.
그렇게 ‘일링 목사관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영국 사회의 총체적 몰이해를 폭로한 계기가 됐다. 의회는 이듬해 법을 개정, 강간 피해자의 익명성을 보장했고, 언론도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당시 영국 형사재판은 검사가 “무죄 판결에 대해 법률 위반이나 절차 문제로만 항소할 수 있었고, 사실의 오인 또는 양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는 원칙적으로 항소할 수 없었다.”(사법제도개혁추진위, 2005년 보고서) 그 규정이 바뀌어, ‘현저하게 양형이 관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검찰이 항소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것도 그 사건 이후부터였다.
‘사건’ 4년 뒤인 1990년, 질은 ‘강간: 나의 이야기 Rape: My Story’(Wendy Green 공저)라는 제목의 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냈다. 그의 책 출간은 그 자체로써, 강간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스스로 공개한 영국 최초의 사건이 됐다. 책은 사건 정황과 재판, 이후 겪은 고통과 제도ㆍ사회의 또 다른 폭력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리고 사회의 야만과 관음증적 관심에 대한 질의 당당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강간은 당신의 삶을 바꾼다. 당신은 결코 과거의 당신과 똑같아질 수 없다.”(텔레그래프, 2006.3.8). 책 출간 이후 질은 신문ㆍ방송 인터뷰와 각종 강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리고 여러 단체를 설립해 성폭력 피해여성 구제와 성범죄 관련 법 개정 운동, 성폭력에 대한 공권력과 재판 배심원, 시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생을 바쳤다. 질 서워드가 1월 5일 뇌(지주막하)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질은 1965년 1월 14일 리버풀에서 2남2녀의 셋째로(일란성 쌍둥이였다) 태어났다. 아버지가 영국국교회 방송 설교자로 발탁되면서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고, 세인트 메리 교구 목사가 된 78년부터 일링 목사관에서 살았다. 질은 청소년기부터 다양한 교회 봉사ㆍ전도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레이디 마거릿 스쿨’이라는 교회 중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는 YMCA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유아원 보모의 꿈을 키웠다. 연인 데이비드는 YMCA 경비원이었다.
사건 후 데이비드는 질에게 청혼했지만 끝내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양극성장애 등을 앓으며 폭력성을 보이다 파혼했다. 질은 그 무렵 세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당시 심경을 질은 “당시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고 책에 썼다. 책을 낸 직후 만나 결혼한 첫 남편(Gray Huxley)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92년 가출함으로써 결혼을 결딴냈다. 교회는 가정을 지키지 못한 책임, 다시 말해 ‘순결한 희생자’가 신앙 안에서 마침내 이룬 극적인 해피엔딩의 서사를 망쳐버린 책임을 질에게 묻기도 했다.(텔레그래프 위 기사) 질은 그 해 교회 홍보 일을 하던 개빈 드레이크(Gavin Drake)와 결혼, 세 아이를 두었다.
질은 강연과 책 인세 수입 등으로 94년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HURT(Help Untwist Rape Trauma)’를 설립했다. 전문가들과 더불어 상담 등을 통해 피해자들의 외상 극복을 돕는 한편 경찰과 법원, 학교 강연으로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법ㆍ제도 및 사법 관행 개선 캠페인을 시작했다. 재판 중 성범죄 피의자가 피해자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도록 했던 규정을 폐지한 것도, 피해자의 옛 이성관계 등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한 것도,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게 한 것도, 구강ㆍ항문 성폭력 등을 가중처벌하게 한 것도 그의 캠페인이 직ㆍ간접적으로 거둔 성과였다.(BBC, 17.1.5)
질은 2008년 총선에 무소속 출마하기도 했다. 성폭력 이슈를 정치무대에서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보수당 후보였던 데이비드 데이비스의 인권 공약- 성범죄 용의자 42일간 구금 반대, CCTV 확충 및 DNA 데이터베이스 확대 반대 등-에 맞서 피해자 인권을 위해서라면 가해자는 물론이고 용의자의 인권은 제약해도 좋다는, 극히 보수적인 공약으로 논란을 낳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자유를 원한다고 한다. 그럼 피해자의 자유는 어디 있는가?”(가디언, 2008.6.26) 질은 낙선했다.
순결한 희생자를 상정하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순도 100%의 정의(正義)를 현실에서 기대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쉽게 특권화하곤 한다. 질은 누가 봐도 불가항력이었던 자신의 피해 상황을 준거 삼아 성폭력의 정황을 차등화하는 등, 의도와 달리 피해자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질은 97년 ‘채널5’ 인터뷰 등에 출연해 강도에게 당한 강간과 데이트 강간은 다르다고 주장했고, 2008년 출마 인터뷰 때도 “마돈나는 경호원을 보호를 받으며 허벅지를 다 드러낸 옷차림으로 공연하지만, 똑 같은 옷차림으로 일반 여성이 외출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인권단체는 그를 성토했다. 영국 성폭력ㆍ학대 연구센터 부소장 줄리 빈델(Julie Bindel)은 “옷차림을 탓하는 것은 성폭행범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폭행범은 낚인 것일 뿐이고, 여성은 옷만 잘 갖춰 입으면 강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하지만) 당신이 어떤 옷을 입든, 어디를 가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당신이 여성이면 위험하다는 게 진실이다”라고 반박했다.(인디펜던트, 1997.6.19)
질은 유죄 판결 전 피의자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데도 반대했고, 범죄 예방 및 수사 편의를 위해서라면 CCTV나 DNA뱅크의 인권침해 가능성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혐의로 풀려난 피의자 DNA를 국가가 관리하는 관행을 금지한 2009년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에도 반발했다.
하지만, 그런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언제나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과 법익을 위해 누구보다 사납게 싸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의의는 그의 존재 자체였다. 그의 당당한 자신감은 음지의 숱한 피해자들로 하여금 정신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었고, 강간과 강간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98년 출소한 주범 호스크로프트를 만나 그를 용서한 뒤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인터뷰에서는 그의 이름 뒤에 줄곧 따라다니는 ‘피해자’ 꼬리표를 두고 “아무 불만 없다. 그 사건이 나를 도전하게 했고, 변화를 위해 일할 수 있게 했다”고도 말했다. 사건 20주년이던 2006년 영국 웨일즈 권트(Gwent) 주 경찰을 상대로 강연한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이제 전혀 아프지 않다. 지난 일은 다만 역사일 뿐이다. 내게 상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처 없다’는 그의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일지 모른다. 또 그 말이 성범죄 피해자의 또 다른 강박이 될 수도 있다. 성범죄 예방과 피해자 인권을 위해서라면 보편 인권은 유보해도 좋다는 그의 강파른 입장은, 끝내 아물지 않은 제 상처의 필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또 하나의 상처일지 모른다. 그는 생존자이자 구원자였지만, 언제나 스스로 피를 흘리는 피해자이기도 했다.
93년 11월 판사직에서 은퇴한 존 레너드는 86년 자신의 판결에 대해 “내 생의 가장 결정적인 오점”이라며 질과 영국 사회에 공식 사과했고, 2013년 잉글랜드ㆍ웨일즈 의회는 성범죄 재판 시 피해자의 인권 보호 등을 대폭 강화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현대 문명사회는 강간에 대한 ‘진부한 미신’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범인은 대부분 어두운 골목길에서 복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미신, 강간범에게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는 뭔가 미심쩍다는 미신, 피해자는 어떻게든 다치고 상처를 입어야 한다는 미신,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어떤 행동이 강간의 원인을 제공했으리라는 미신…. 2014년 앨리슨 손더스 검찰총장은 성범죄 사례 및 통계 등을 인용하며 “대다수 강간범은 피해자와 잘 아는 사이이며, 수많은 피해자들이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며, 사후 감당하는 상처 역시 천차만별이다. 성범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부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밝혔다.(BBC, 2014.11.12)
질은 2014년 성범죄근절 활동가 앨리슨 보이들(Alison Boydell)과 함께 ‘JURIES( Jurors Understanding Rape Is Essential Standard)’라는 단체를 설립, 성범죄 관련 재판 배심원들에게 성범죄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교육을 의무화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한때 그와 껄끄러웠던 여성단체들도 상실의 슬픔을 함께 했다. ‘Rape Crisis’는 “질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용감하고 도전적이고 영감을 주는 여성이었다”고 애도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수 등 정치인들도 그에게 꽃을 바쳤다. 법무장관 제러미 라이트(Jeremy Wright)는 “그의 불굴의 캠페인은 수많은 정치인들의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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