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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투 대주교 임명

입력
2017.02.03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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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3

2009년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수여식장의 데즈먼드 투투.
2009년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수여식장의 데즈먼드 투투.

넬슨 만델라의 찬란한 빛에 가려 덜 빛났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의 주역으로,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외에도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를 언급해야 한다. 그는 약 27년간(1962~90년) 옥에 있던 만델라를 대신해, 교회와 거리에서 반차별의 정의와 반폭력ㆍ화해의 정신을 전파하고 길을 낸 상징적ㆍ실질적 지도자였다.

1931년 10월 7일 요하네스버그 근교 빈민촌에서 태어난 투투는 모욕적인 차별 속에 성장했다. 어렵사리 대학을 나와 교사로 일하던 50년대 초, 저 악명 높은 ‘반투 교육법’(53년)이 시행됐다. 모든 흑인아동의 취학을 정부가 통제하며, 백인- 혼혈- 인도인- 흑인 등 인종별 교육시스템을 17개 체계로 분리해 교육의 질을 차등화한 것. 한 마디로 흑인은, 투투가 어렵게나마 누릴 수 있었던 고급 교육의 기회를 박탈 당했다. 투투는 교사를 그만두고 성베드로대학에 입학, 신학을 공부했다. 각종 인종차별법은 50년대 내내 주거 취업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더 집요하게 흑인 사회를 옥죄고 들었다.

61년 국교회(성공회) 사제가 된 투투는 이듬해부터 약 5년간 런던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했고, 유럽의 정치와 차별에 대한 상대적 자유를 경험한 뒤 67년 귀국해 차별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는 75년 흑인으로선 최초로 요하네스버그대성당 수석 사제장이 됐고, 국제사회에 남아공의 불의에 대해 성토하며 경제제재 등 실질적인 지원을 촉구했다. 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85년 2월 3일 남아공 종교 최고위직인 대주교가 됐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로부터 수 차례 여권을 압수당하고, 체포돼 벌금형을 선고 받았고, 극우단체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곤 했다.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던 그의 입장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과격파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했다. 94년 집권한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모든 차별 범죄를 조사하는 진실ㆍ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 그를 임명했다.

97년부터 전립선암과 투병해온 투투는 2014년 7월 조력자살에 찬성하는 글을 가디언 일요판 옵서버에 기고했다. “나는 산 자의 존엄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고, 이제는 죽어가는 사람의 존엄이라는 이슈에 전념하고 싶다.(…) 나는 삶의 신성함을 숭배하지만 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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